츠바이크에 대한 몰입이 츠바이크의 마지막 나날들을 향한 골똘한 시선으로.
츠바이크의 전기물을 꽤 읽었다. 그러다보니 츠바이크라는 인물에 대한 관심도 부쩍 커졌다. 특히 브라질로 옮겨간 츠바이크가 어째서, 그러니까 아직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기는 하지만 전쟁의 참화로부터 한참 떨어져 있는 그곳 브라질의 리우에서 아내인 로테와 함께 동반자살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는지, 구상중이거나 집필중인 책이 있었음에도 그예 죽음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자신을 몰아갔는지 안타까움과 동시에 그 원인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던 것이다. 그러니 여기 이제 바로 그 츠바이크의 마지막 나날들을 기록한 전기물이 등장하였으니 어떻게 읽지 않고 배겨나겠는가.
“그는 불명예보다는 유배가 낫다는 사람이었으므로 런던을 떠나 뉴욕으로 갔다. 그다음에는 뉴욕에서 도망쳤다. 도피는 그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잘츠부르크에서 런던으로, 런던에서 뉴욕으로, 뉴욕에서 리우로. 이제 브라질 다음은 어디로 넘어가게 될까?”
오스트리아 태생인 츠바이크는 독일에서부터 시작된 전운을 감지한다. (츠바이크는 유대인에 대한 박해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그야말로 이후에 일어날 홀로코스트의 예언과도 같았다) 그리고 스스로 비겁하다고 여길 수도 있을 대이동을 시작한다. 유럽에서 북아메리카로, 그리고 다시 남아메리카로 이어지는 도망자의 신세 동안 츠바이크는 아마도 점차 약해졌을 것이다.
“집에 있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그는 항상 베로날 병을 소지하고 다녔다. 놈들은 그를 산 채로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의 몸뚱이를 훼손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후대 사람들에게 피범벅이 된 자신의 얼굴 사진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문이 삐걱대는 소리를 내자마자 베로날은 암살자들이 무기를 써볼 겨를도 없을 만큼 신속하게 약효를 발휘할 것이다...”
사실 츠바이크의 자살의 원인을 나는 휴머니스트인 그가 가지는 유약함, 그러한 유약함을 불러일으킨 실재하는 것은 아니었던 어떤 공포인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도망치듯 머물고 있던 당시의 브라질은 독일과 국교를 단절하지도 않았고, 독일로부터 넘어온 많은 스파이들이 활동을 하면서, 망명한 유럽의 인사들에 대한 암살이 자행되는 공간이었다.
“... 절망은 그와 인간 세계를 잇는 다리를 불살라버렸다. 그는 진이 다 빠졌고, 이제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이러한 실질적인 위험과 함께 츠바이크는 히틀러의 독일이 망가뜨린 세상,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살상을 전해들으면서 큰 절망으로 빠져 들었던 것 같다. 여기에 더해 이러한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 속에서도 자신은 어떠한 정치적 행보도 할 수 없는 현실, 애초에 그러한 정치적인 인간으로서의 활동이 불가능한 인간이라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가져다주는 절망감 또한 무시할 수 없었으리라.
“그래, 자네는 그의 행위에 대해 상당히 매혹되어 감정이입을 하는 것처럼 글을 쓰지 않았나. 동반자살을 찬양이라도 하는 듯한 인상을 주더군. 내 기억이 맞다면 자네는 클라이스트가 더없이 아름다운 최후를 맞았기 때문에 독일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고 했네. 그런 잔인한 죽음을 숭고한 것으로 미화시켰지.”
덧붙여 그가 택한 로테와의 동반자살은 그가 클라이스트라는 시인에 대해 작성한 에세이에 나오는 클라이스트와 그의 아내의 동반자살을 예찬한 그의 글에서 예감할 수도 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하는 마지막, 그것으로 자신의 책임을 마감하는 한 남자는 바로 츠바이크이기도 하다. 책은 1941년 가을, 츠바이크 내외가 뉴욕에서 브라질로 넘어와 1942년 2월 22일 자살을 하기까지의 시간을 대상으로 한다. 그리고 츠바이크가 자신의 전기에서 그러했듯 저자 또한 마치 츠바이크의 마지막 나날들에 동행하기라도 한 듯, 그 심리적인 묘사까지 신중을 기하고 있다. (의사이며 소설가인) 저자는 자신의 의학논문을 츠바이크에 헌정할 정도로 츠바이크에 빠져 있는데, 그러한 몰입이 있었기에 쓸 수 있던 책이라 여겨진다.
로랑 세크직 / 이세진 역 /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나날 (Les Derniers Jours de Stefan Zweig) / 현대문학 / 231쪽 / 2011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