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되어버린 남자》알폰스 슈바이거르트

장서가 혹은 애서가에서 '그 책'으로 형질 변경된 버블리 씨를 추모하며.

by 우주에부는바람

“비블리 씨에게 인간의 기본 욕구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이루어졌다. 마시고, 자고, 먹고, 읽는 것인데, 앞에 열거한 세 가지가 어느 정도 채워지고 나면, 단연 독서가 1순위로 등극했다. 그의 정신세계에서는 책을 읽는 것이 바로 양식을 의미했다. 또한 책은 수면이 제공하는 것과 다름없는 수준의 휴식을 만들어 주었고, 수면과 마찬가지로 꿈속에 빠져들어 소소한 일상을 잊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손발이 저리고 (특히 오른쪽) 뒷덜미에 통증이 느껴지며 식욕은 전혀 생기지 않고 하루에 세 시간 이상 잠을 자지 못하는 스트레스 증상으로 고생 중이다. 신경정신과를 찾아볼까 생각했으나 이미 원인을 알고 있으니 굳이 뻔히 아는 이야기를 (아마도 동년배 정도일 의사와) 나누기가 뭣하여 포기했다. 대신 마지막 희망처럼 책 읽기로 버티고 있는 중이니, 지금의 내 상태와 이번에 집어든 책은 절묘하게 궁합이 맞는다고 해야 하겠다.


“의식을 잃었던 비블리 씨는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다. 요동치던 통증은 그쳤지만, 온몸이 뻣뻣하게 위축된 느낌이 들었다. 비블리 씨는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크게 당혹해하지도 않고, 자신이 책이 되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렇지만 동시에 바로 그러한 이유로 오싹하다. 그야말로 반쯤은 혼미한 상태로, 목이 잘린 김유신의 말이라도 된 것처럼, 어떤 의지의 개입도 없이 밥을 먹고 업무를 처리하고 수영을 하고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나, 바로 그 나를 객관화시키는 새벽 시간의 독서가 지금도 오싹한데, 바로 그렇게 반쯤은 넋이 나간 독서와 소설 속의 주인공 버블리 씨가 책이 되어가는 과정이 은근히 닮아 있는 탓이다.


“비블리 씨에게 있어서 독서란 하루도 빼놓을 수 없는 습관이 되었고, 나아가 하루라도 제때 충족시키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강렬한 욕구가 되었다. 독서는 방, 나무집, 잔디밭, 강변, 다락 등 어디에서든 할 수 있었다. 특히 묘지에서 유독 책이 잘 읽혔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읽기를 좋아하였고 자라서는 장서가 내지는 애서가였던 비블리 씨는 어느 날 노점 벼룩시장에서 한 여자의 죽음을 목격하고, 그 여자의 죽음 앞에 놓여져 있던 한 권의 책을 (지금까지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음에도) 슬쩍 훔쳐서 집으로 가지고 온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의 집에 책이 들어온 순간부터 비블리 씨는 꿈과 환각과 육체적 통증에 시달리다 결국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게 되고 급기야 자신이 애지중지 모아서 가지고 있던 책들을 모두 팔아버린다.


이후 책이 되어버린 버블리 씨는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조금씩 책으로서의 자기 자신에게 익숙해져 간다. 물론 때로는 자신의 숙명에 항거하기도 하고, 책으로서의 자신을 모욕하는 이들에게 반격을 가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책으로서의 운명 또한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처음 책을 구입하였던 것과 비슷한 벼룩시장에 놓여 있던 버블리 씨, 그러니까 ‘그 책’은 다시 한 번 새로운 주인을 맞이 하기 위하여 버블리 씨를 튕겨낸 것이다.


“... 책에서 미묘한 변화가 서서히 일기 시작해, 낱낱이 낱장으로 분열되었던 뇌가 하나로 모이고, 종양들이 촘촘하게 돋아났던 척추가 곧게 펴지며 그 위로 피부가 덮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엇다... 그리고 실제로 버블리 씨는 책에서 튕겨져 나왔다. 그는 인간의 몸으로 돌아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고,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사실 이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이란 없다, 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우리 인생에서 수습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초낙관주의를 표방하며 살아왔다. 그러니 몇 주째 물러가지 않고 지속되는 우울증이 낯설고 그만큼 감내하기가 쉽지 않다. 토해내지 못하는 불붙은 한숨들이 역으로 나의 중심을 공격하는 형국이다. 그러니 지금과 같다면 소설 속 버블리 씨처럼 어느 순간 몽뚱이는 사라진 채 옷가지 속에 덩그러니, 책 한 권으로 남는다고 해서 크게 놀랄 일도 아니다. 버블리 씨를 튕겨낸 ‘그 책’이 어딘가에 있다면 말이다.



알폰스 슈바이거르트 / 남문희 역 / 무슨 그림 / 책이 되어버린 남자 (Das Buch) / 비채 / 199쪽 / 2009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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