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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퍼키스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

몸으로부터 분리되지 못하는 마음의 기색, 사선으로 흩뿌려지는 시선을 감추

by 우주에부는바람

현재의 힘겨움이 조금 사그라진 이후 다시 사진 찍는 일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 다른 누구의 시선도 아니고 나의 시선을 통하여 포착된, 분열된 나이든 통합된 나이든 온전히 나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의 상으로 맺혀진 결과물들을 보면서, 조금은 혼동스러워 하면서도, 또 주억거릴 수 있는 사진 한 장 앞에 놓고 길고 긴 한숨으로 모든 것을 떨쳐낼 수 있는 힘을 거머쥐고 싶다.


“사진은 ‘아이디어’다... 사진은 시간의 밖에서 온 ‘아이디어’다. 사진은 눈으로 보여진 통찰이다... 일텔리전스intelligence는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범주에 속한다. 그래서 성공적인 사진은 형식과 내용을 분리할 수 없다. 형식과 내용은 동시에 발생한다. 사실, 그 둘 사이엔 어떤 차이도 없다.”


일반 대중에게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필립 퍼키스는 사진을 공부하는 학생이나 사진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에게는 꽤 알려져 있는 인물인 듯하다. 스스로 사진 작업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사진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는 작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진에 대한 생각, 그리고 사진을 공부하는 사람 혹은 가르치는 사람이 사진을 대함에 있어서 가져야 하는 (그리고 작가 자신이 사진을 대함에 있어서 가지고 있는) 이런저런 단상, 그리고 사진을 찍는 작업을 위해 시도하면 좋은 연습을 한 권의 얇은 책에 담고 있다.


“기술의 발전이 사회, 정신, 문화를 변화시켜 온 것인가, 아니면 끊임없이 공백 상태를 만들어내는 문화의 속성 때문에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기술이 발전해 온 것인가. 나는 이 물음에 대한 명쾌한 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둘의 관계는 대단히 흥미로우며 늘 주시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일단은 작가의 열려 있는 태도가 좋다. 사진의 기술 발전과 그에 따른 변화의 상황에대해 고집스럽게 어느 한 쪽의 편을 드는 대신 작가는 우리들이 계속 주시해야 하는 무엇으로 그것을 가리키고 있다. 이와 함께 사진을 구분하는 우리들의 시선 (혹은 예술을 구분하는 우리들의 시선) 에 대해서도 주의를 요구한다. 어느 한쪽으로의 치우침 없이 탈고정적인, 사진 작업에 대하여 필립 퍼키스라는 스승은 아직 진행형인 신생 예술을 대하는 조심스러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진교육이 안고 있는 가장 불쾌한 추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록Documentary’사진과 ‘순수예술Fine Art’ 사진을 따로 갈라서 구역을 정해 놓은 것이다... 모든 사진은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있으며, 모든 사진은 사진가가 결정을 내린 순간 찍혀지기 때문에 얼마간 사진가의 의도가 ‘표현된’ 것이다... 선을 그어 놓고 한쪽만을 취하도록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해악이다.”


모두가 사진을 찍는 시대이다. 거추장스러운 사진기를 들고 다니지 않더라도 언제든 자신의 디지털 기기를 꺼내서 사물을 포착할 수 있는 세상이다. 더불어 언제 어디서든 웹캠이든 휴대폰이든 CCTV이든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의 피사체가 되는 세상이기도 하다. 전세계의 CCTV를 폰에서 확인할 수 있는 어플리케이션이 나오는 세상이고, 그러한 CCTV를 이용해서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세상이기도 하다.


“나는 어떤 장소에 서 있다. -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 내 앞에 놓인 무언가를 바라본다. - 그것에서 어떤 주제가 튀어나올지 알 이유도, 알 방법도 없다. - 나와 그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빛. 그 빛을 기록하는 작은 카메라를 집어든다. 결과는 내 한계를 초월하는 세계를 보일 수도, 고양된 내 감정을 드러낼 수도 있다. 이 모든 과정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나는 모른다. 앞으로도 절대 알지 못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사진기가 가지는 (또는 사진기를 대신하는 많은 디지털 기기들이 가지는) 기계적인 매커니즘의 발전이나 변화와는 무관하게, 렌즈를 들여다보는 시선과 피사체 사이의 매커니즘은 (희망적이게도) 온전히 드러나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들이 같은 기기와 같은 테크닉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사진 작업물의 결과물들은 그러한 매커니즘을 배반하고 전혀 다른 결과물들을 우리 앞에 내놓는 것이다.


“사진교육의 근간을 이루는 본질이 결코 바뀌어선 안 된다. 공간, 질감, 색, 전망, 시간, 예측의 순간, 표현, 다른 사람들과의 주체적 관계와 협동, 사진의 역사와 미학은 물론이려니와 사진이 창조되는 순간의 그 광대한 ‘의미’의 세계를 우리는 배운다... 디지털이라는 도구를 쓴다고 해서 이러한 측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바닥 드러내며 쩍쩍 갈라지는 호수의 바닥과도 같은 심경, 어쩌면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날 들여다봐주는 렌즈일런지도 모르겠다. 직선도 아니고 곡선도 아닌 위험천만한 사선, 화창한 봄날의 거짓 빗방울처럼 마음을 긋고 지나가는 사선이 가득한 내 마음을 더욱 혹독하게 개봉할 수 있는 칼날같은 시선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결국 사선의 시선은 스스로 생채기를 품고 있다. ‘의미’는 렌즈의 속이 아니라 언제나 그 바깥에 있는 것이리라.



필립 퍼키스 / 박태희 역 /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 : 사진과 삶에 관한 단상 (Teaching Photography) / 151쪽 / 안목 / 2005,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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