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혜영 《저녁의 구애》

위기천만의 기운 가득한 속에서도 무색무취한 우리들 일과 노동의 세계 속으

by 우주에부는바람

우리 문단에서는 보기 드문 그로테스크함으로 무장한 작가인데, 이번 소설집에서는 그러한 경향이 조금 옅어졌다고. 그 묘사나 설정의 그로테스크함이 잔뜩 옅어진 대신 폭풍 조차 사라진 모래 사막의 한가운데에라도 있는 듯 참을 수 없는 무미건조함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무심한 듯 진행되는, 그럴싸한 서사도 눈길 잡아 끄는 사건도 없는, 그럼에도 위기천만의 기운 가득한 무색무취의 세계가 우리들의 세계 (일과 노동의 세계) 라고 생각하면 저절로 소름끼치는 그로테스크함이라니...


「토끼의 묘」.

토끼 묘가 아니라 토끼의 묘라는 아이러니... 세상에는 묻지마 살인이 횡행하고,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키우던 애완동물을 내다 버린다. 사람들은 묻지마 살인에도 불구하고 거리를 내달릴 수밖에 없고, 버려진 애완동물들은 또 누군가의 품으로 들어가거나 다시 버려진다. 그렇게 세상은 위험천만 하지만 또 우리는 그 위험천만한 세상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살아간다.


「저녁의 구애」.

표제작이다. 어느 날 아는 사이라는 이유로 장례식장의 화환을 주문받는 나... 그러나 그 화환을 트럭에 싣고 달려간 그곳에서 아직 그 화환의 주인이어야 할 사람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으되, 아직 죽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도시에 남아 있는 여자에게 전화한다. 그리고 그를 만나고 싶은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조심해서 오세요. 그분이 빨리 돌아가실 빌게요.” 바로 그 저녁에 이루어지는 어설픈 구애...


「동일한 점심」.

대학 구내의 복사실에서 근무를 하는 나는 항상 같은 점심을 먹는다. “... 구내식당의 정식 A세트를 기준으로 그의 하루는 데칼코마니처럼 오전과 오후가 동일하게 반복되었다...” 게다가 모든 일상의 생활 또한 언제나 똑같다. 언제나 같아서 한숨쉬게 되지만 언제나 같아서 다행이라 생각하게도 되는 나는 어느 날 전철역에서 한 사건을 목도한다. 하지만 사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어지는 나의 하루하루...


「관광버스를 타실래요?」.

자루를 배달하라는 명령을 받은 두 명의 직원 케이와 에스. 그 안의 내용물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둘이서 함께 자루를 들고 도에서 시로, 시에서 군으로, 군에스 읍으로, 그리고 한 마을의 폐가와도 같은 집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까무룩 잠시 잠이 든 사이 그들이 옮겨 놓은 누군가에 의해 사라지고 이들은 이제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중이다.


「산책」.

보다 나은 상승을 위하여 임신한 아내와 함께 이사한 고장의 집, 그 집에는 순하지만 그 존재만으로 겁낼 수밖에 없는 커다란 개가 살고, 그 마을에는 멧돼지 소리가 들린다. 지점장의 친척의 집에서 묵기 시작한 것이 화근이 되었고, 발을 뺄 수도 더 들어갈 수도 없는 일상을 살짝 벗어나 그는 개를 끌고 숲으로 들어간다.


「정글짐」.

갑작스러운 출장으로 방문을 한 중국의 어느 호텔... 자신의 할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채 그는 낯선 나라의 낯선 거리를 헤매이고 다닌다. 차근차근 올라가면 결국 꼭대기에 도달하는 정글짐... 속이 훤히 보이는 미로와도 같은 정글짐의 추억과 낯선 거리에서의 길 찾기는 애매하지만 매치가 되는데...


「크림색 소파의 방」.

이사짐 트럭을 보내고 나는 아내와 젖먹이 아기를 대동한 채 승용차를 몰고 이사짐 트럭과는 다른 길로 이사할 집을 향한다. 비는 내리고 차는 자꾸 말썽을 부리고 길에서 만난 청년은 불량하다. 그리고 먼저 도착한 이사짐 센터 직원들의 전화... 이사짐 속의 크림색 소파는 이사한 집의 거실에 제대로 들어맞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대각선으로 어색하게 놓여지고 마는 크램색 소파... 나는 아직도 그곳으로 향해 달리는 중이다.


「통조림 공장」.

그 통조림 공장의 통조림에는 통조림에 들어 있을만한 것들만 들어 있다고 믿을 수 있을까? 통조림을 열심히 밀봉하는 일에 전력하였던, 사라진 공장장은 도돼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공장장이 없어도 공장은 돌아가고 새로운 누군가가 공장장이 되고 직원들은 점심이면 통조림 반찬과 함께 밥을 먹는데...



편혜영 / 저녁의 구애 / 문학과지성사 / 257쪽 / 201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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