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현실에 이르지 못하는 의식적인 반발로서의 모호한 변형의 욕망...
에피소드 1. 지지난 해이던가 삼십여년만에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났다. 나는 중학교에 입학하고 일주일도 채우지 못하고 이들과 헤어졌는데, 포천에서 용인으로 이사를 한 탓이었다. 나는 새로 들어간 용인의 중학교에서 살짝 주눅이 들었던 것 같은데, 비슷한 시기에 나는 포천에 두고온 동창들이 단체로 보내온 편지를 받았다. 그리고 나는 이 편지들을 읽으면서 스스로를 위무하였다. 물론 초등학교 동창들은 내게 그런 편지를 보낸 적이 없다고 했다.
“도대체 진실이라는 게 뭐죠? 뭐가 현실인가요?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당신은 현실인가요? 여기 있는 내가 현실이에요? 대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망상인 거죠? ... 자네가 믿고 싶어하는 부분까지가 망상이고 나머지는 전부 현실이지. 자네가 버리고 싶어 하는 부분, 그게 바로 진실일세.”
에피소드 2. 독일에 유학 중에 대마초를 피웠다는 후배는 그 상태의 환각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대마초를 피운 후에 머리 속에서 거대한 나무가 하나 자라났다. 그 나무에서는 동시에 백 개의 가지가 뻗어 나갔는데, 그 백 개의 가지가지 마다에 하나씩의 생각이 매달렸다. 그렇게 백 가지의 생각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자리에서는 아닌 척 하였지만, 난 당시에 두고두고 백 가지 생각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환각의 상태를 조금 흠모했던 것 같다.
“현실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환각이 보이는 상태로 좀 살면 안 되는 건가요? 현실이라고 해봐야 좋을 것도 없잖아요. 물론 환각이 무조건 좋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결국 마찬가지잖아요. 나는 이제 환각도 현실도 상관없어요. 모래든 시멘트가루든 결국은 딱딱하게 한 덩어리로 굳어버리곤 끝이잖아요. 닥터, 나는요,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더 이상 궁금한 게 없어요...”
이전 작품인 <악어떼가 나왔다>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은데, 작가는 말끔하고 투명한 현실을 믿지 않거나 원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어쩌면 맑고 투명한 현실에 대한 의식적인 욕망이 반대로 글에서는 이렇게 모호하고 정착하지 못하는 상황들에 대한 소구로 작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소설 속의 인물들, 김종수, 정수연, 닥터 팽 등은 끊임없이 변한다.
“나는 고작 이틀 사이 울창하게 다시 자라난 닥터 팽의 수염을 눈여겨보았다. 번들거리는 립스틱과 붉은 보라색 매니큐어도 말끔하게 지워져 있었다. 지난번 검은 홈드레스 차림의 닥터 팽이 환각일까 오늘의 털북숭이 닥터 팽이 환각일까.”
물론 그들의 모습만 바뀌는 것은 아니다. 닥터 팽에게 이야기하는 김종수의 가족 관계 또한 계속 변화하고, 김종수와 정수연의 관계 또한 종잡을 수 없는 변천의 과정을 겪는다. 일어나는 사건들은 진실인지 허구인지 알 수 없고, 그들이 뱉어내는 말들 또한 마냥 믿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사건은 벌어지고 독자들은 오리무중의 독서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닥터 팽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을 크게 벌려 하품했다. 입속으로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새빨간 혀가 들여다보였다. 지금 막 페인트 통에 집어넣었다 뺀 것 같은 섬뜩한 색이었다.”
간혹 재기발랄한 표현들이 등장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음습한 편이다. 스스로를 향해서도 믿음을 보이기 힘들어 하는 복잡한 현대인의 심리가 적당한 선에서 표현되고 있고, 종종 나 또한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더더욱 음습하게 느껴진다고도 하겠다. 물론 입에 착 달라붙는 질감을 제공하고 있는 소설은 아니다. 어딘가 서걱거리고 개운치 못하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그러니까 불굴의 의지 같은 것은 없어 보이는 이 맹탕의 등장인물들이 우리와 다른 듯 많이 닮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살짝 닮은 듯도 하지만 전혀 다르게 느껴진 탓이다.
안보윤 / 오즈의 닥터 / 이룸 / 272쪽 /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