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먼 과거에서 온 것 같은 투명한 문장으로...
클레어 키건의 문장은 아주 짧다. 내가 읽은 어떤 소설보다 짧은 문장들로 이야기들이 연결되어 있다. 그럼에도 소설을 읽는 동안 심상이 끊어지는 경우는 없다. 문장이 복잡하지 않아 맑고 투명하게 연결된다. 그리고 이러한 투명함 때문인지 작가의 소설은 조금 먼 과거에서 온 것처럼 느껴진다. 이천 년대의 초반이 아니라 천구백 년대의 초반에서 발굴된 좋은 소설같다.
「작별 선물」
“이제 당신은 층계참에 서서 행복을, 좋은 날을, 즐거운 저녁을, 친절한 말을 기억해 내려 애쓴다. 작별을 어렵게 만들 행복한 기억을 찾아야 할 것 같지만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대신 키우던 세터가 새끼를 여러 마리 낳았을 때가 기억난다. 어머니가 당신을 그의 방으로 들여보내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헛간에서 어머니가 반으로 자른 나무통 위로 몸을 숙이고 자루를 물속에 넣었고, 결국 낑낑거리는 소리가 멈추고 자루가 고요해졌다. 강아지들을 물에 빠뜨려 죽인 날,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 당신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pp.17~18) 이 문단으로 이 소설 전체가 요약될 수도 있겠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 비정한 소설로 들어서면 일순 온몸이 돌처럼 굳어버리게 될 것이다.
「푸른 들판을 걷다」
“사제가 댄스플로어를 가로지른다. 신부가 양손을 내밀고 서 있다. 그가 신부의 손에 진주를 내려놓자 그녀가 그의 눈을 들여다본다. 눈물이 고여 있지만 그녀는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에 눈을 깜박여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기만 하면 사제는 그녀의 손을 잡고 여기서 달아나리라. 적어도 사제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바로 그것이 그녀가 한때 바라던 일이었지만 세상에서 두 사람이 같은 순간에 같은 것을 바라는 일은 거의 없다. 때로는 바로 그 점이 인간으로서 가장 힘든 부분이다.” (p.52) 사제는 성당 마당에서 진행되는 결혼식에 참가하고 있다. 하지만 신랑과 신부에게 축복을 내릴 형편은 아니다. 사실 신부는 사제를 사랑하였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찌만 그것을 뿌리친 것은 사제였다. 두 사람은 육체적 관계까지 나눈 사이이다.. “...그녀는 모든 대화에 보이지 않는 그릇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야기란 그 그릇에 괜찮은 말을 넣고 다른 말을 꺼내 가는 기술이었다. 사랑이 넘치는 대화를 나누면 더없이 따스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고, 결국 그릇은 다시 텅 빈다. 그녀는 인간 혼자서는 스스로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사랑을 나누는 행위 너머에 진짜 앎이 있다고 믿었다. 그는 때로 그런 그녀의 생각에 화가 났지만 그녀의 말이 틀렸음을 결코 증명할 수 없었다...” (pp.61~62)
「검은 말」
브래디의 그녀가 그를 떠난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하여 답답하다. 그녀의 ’검은 말‘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짚어내기 힘들다. 그가 다룰 수 있는 것과 다를 수 없는 것, 그 경계에 ’검은 말‘이 있는 것으로 짐작할 따름이다.
「삼림 관리인의 딸」
아하울의 삼림 관리인 디건은 다른 지역에서 마사 던을 만났고 그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하지만 마사가 생각한 디건과 아하울에 돌아온 다음의 디건은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하울을 떠나려 하는 첫째 아들, 모자란 둘째 아들 그리고 머리가 좋은 막내 딸을 차례대로 낳았고 그곳에 눌러 앉았다. “침묵의 뚜껑이 디건 가족을 덮는다. 너무 많은 말을 했기 때문에 할 말이 남지 않았다. 요즘은 이웃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 디건은 미사 참례도 그만두었다. 그게 무슨 소용인지 이제 모르겠다. 그는 더 늦게까지 일하고, 먹고, 우유를 짜고, 목요일마다 테이블에 돈을 누고 나간다.” (p.136) 하지만 디건이 딸에게 선물했던 리트리버를 다시 주인에게 돌려주고 온 다음,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이들의 관계는 파국을 향하게 되고, 아하울에 불탄 집만이 남게 된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물가 가까이」
“한 시간이야, 마시. 한 시간 줄게... 한 시간 뒤에 이 자리로 돌아오지 않으면 당신이 알아서 집까지 찾아와... 할머니는 맨발로 거품이 이는 바닷가를 30분 동안 걸어간 다음 절벽 길을 따라 돌아왔고, 약속 시간이 5분 지났을 때 남편이 차 문을 쾅 닫고 시동을 켜는 것을 보았다. 그가 차를 출발시키려 할 때 할머니가 도로에 뛰어들어 차를 세웠다. 그런 다음 차에 올라탔고, 자신을 두고 집에 가려 했던 남자와 평생을 함께 살았다.” (p.149) 다른 소설이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한다면 이 소설만은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어머니의 어머니인 할머니의 일화를 백만장자의 아들이 되어 있는 청년이 떠올린다. 언젠가 청년은 수영을 잘하는 할머니가 정작 바다에서는 왜 수영을 하지 않았는지 물은 적이 있다. 그리고 ’할머니는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 몰라서 그랬다‘라고 대답했다.
「굴복」
“누군가를 모욕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었다. 그는 어느 날 밤 침대에 누워서 아내가 자는 줄 알고 어둠 속에서 이 말을 소리 내서 했는데, 아내는 때로 누군가를 모욕하지 않기가 더 힘들다고, 그리스도인이라면 극복하도록 노력해야 할 약점이라고 대꾸했다. 그는 아내의 숨소리가 달라진 뒤에도 한참 동안 잠 못 이루고 누워서 그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무슨 뜻이었을까? 여자의 마음은 유리로 만들어졌다. 너무 투명하지만 또 너무 쉽게 깨졌다. 더 단단한 다른 유리 같은 생각에 졌다. 남자를 매료하는 동시에 겁을 주기에 충분했다.” (p.166) 엉뚱하게 처음에는 이것이 중사의 상념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보초병인 도허티의 이야기였다. 중사는 도허티에게는 강하지만 주머니 속에 있는 그녀의 편지를 꺼내지도 못한다. 어쩌면 무조건적인 우위를 고수할 수 있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퀴큰 나무 숲의 밤」
“꿈속에선 헛간 다락에 있었고 바닥에서 풀이 자랐다. 풀이 집채보다 높이 자랐고, 바람도 없는데 줄기가 서쪽으로 기울었다가 동쪽으로, 또다시 서쪽으로 기울었다... 잠에서 깬 마거릿은 자신이 남자로 변하지 않았는지 확인하다가 손을 보고 기분 좋은 충격을 받았다. 피가 비쳤기 때문이다. 마거릿은 그 시기가 다 끝났다고 생각했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가서 몸을 씻었다.” (p.203) 그리고 이제 그녀는 마흔이 넘은 옆집의 남자 스택과 관게를 맺는다. 그녀는 오래전 아이를 낳은 적이 있지만 곧 아이를 잃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스택과의 사이에서 마이클을 낳았다. 아이는 죽지 않았고, 그녀는 스택과 아이를 남겨 두고 떠난다.
클레어 키건 Claire Keegan / 허진 역 / 푸른 들판을 걷다 (Walk the Blue Fields) / 다산책방 / 251쪽 / 2014 (2007,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