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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뱅 로시뇰 《우리 공장은 소설이다》

지식은 구식이 되어도, 성찰은 우리의 미래를 값지게 할 것이니...

by 우주에부는바람

박노해, 백무산, 김해화를 비롯한 시인과 방현석, 김하경, 정화진, 엄우흠 등의 소설가를 비롯하여 현장에서 배출되는 많은 노동문학 혹은 노동자문학들이 있었다. 물론 7~80년대의 이야기이며, 90년대 이후 이 노동문학의 맥은 거의 끊겼거나 설령 면면히 이어진다고 할지라도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창작되고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소비될 것이라고 짐작되어질 뿐이다. 과거의 그 기세는 사라진지 오래이며, 이 팽배한 신자유주의 시대의 엄혹한 현실을 구체적으로 노동 현장을 통하여 발현시키는 문학을 찾아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첫 주 동안 이 세 명의 신입 사원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공장에 생명을 부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같은 착각은 금세 사라졌다. 공장은 이미 <살아가고 있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수천 명 역시 살아가고 있었다. 박테리아 집단과 인간의 소화기관이 공생 관계에 있듯 임금노동자들도 공장과 공생 관계에 있다. 박테리아 집단이 인간의 소화기관을 먹고 살듯 노동자들은 공장을 먹고 살아가며, 공장 역시 노동자들을 먹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출판(노동)을 하고 있는 선배로부터 받은 한 권의 소설은 그래서 신선하다. 저기 서유럽의 프랑스, 로맹빌이라는 지역에 자리 잡은 루셀-위클라프라는 이름의 (물론 합병으로 인해 계속 이름은 바뀌지만) 거대 제약회사를 배경으로 한, 1967년에서 2007년에 이르는 살아 있는 공장의 이야기, 공장에서 일을 하는 노동자들의 삶과 사랑과 우정과 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일은 오래전 대학 문학회에서 노동 문학을 합평하던 시절을 잠시 떠올리게 만든다.


“공장은 성벽에 갇혀 있는 곳이 아니다. 세계가 투영되는 곳. 그곳은 세계의 근거이자 반영물이다. 공장이 곧 세계인 것이다.”


소설은 수 천 명이 근무하는 제약회사인 루셀-위클라프에서 일을 하는 여러 인물들을 번갈아가며 보여주면서 진행된다. 이제 막 연구원으로 취직하는 십대의 졸업생들, 아이를 뱃속에 품은 채 수습 기간을 통과할 찰나에 있는 포장부 여직원을 비롯해서 기계 고장을 이유로 공장의 노동자들에게 쓸 유인물을 작성하는 초짜 노조원과 이에게 조언을 하는 고참 노동 운동가까지 다양한 인물 군상이 등장한다.


“... 그녀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그녀의 노동에 대한 사랑을 설명해 주었다. 노동은 인간에 의해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이 같은 합병은 정확히 그에 반대된다. 성층권의 고도에서 결정을 내리는 이들은 그 어떤 임금노동자도, 그 어떤 연구원도, 그 어떤 비서도 구분해 내지 못한다. 이들은 하나의 점, 아니 하나의 숫자에 불과할 뿐이다. 줄여야 할 비용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노동 현장에 있는 인물들 뿐만 아니라 간부 직원과 연구소의 상급 직원, 그리고 노동자들을 감시하는 경비원들의 관리 직원과 비서들까지 공장이라는 거대한 세상에 있는 모든 인물들이 바로 소설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때때로 반목하지만 때로는 서로를 이해하면서, 결국 최상급 경영자 혹은 일부 대주주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대부분이 공장과 생사를 같이 하는 운명 공동체일 뿐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투쟁은 인간을 먹어 치우지. 그래서 늙는 거라네. 좋은 쪽으로도 늙고 나쁜 쪽으로도 늙는 거지. 말하자면… 삶이 가속되거나, 아니면 응축되는 거야. 노동조합은 내게 수년의 삶을 주었네. 노조가 없었더라면 난 일을 견뎌 낼 수 없었을 거야.... 투쟁은 삶을 도와준다네. 그리고 삶은 투쟁을 돕지...”


사실 이 소설은 루셀-위클라프 사가 합병과 인수의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은 산산히 흩어지는 과정을 지켜본 로맹빌의 노동자들, 이 노동자들의 모임인 RU협회가 작가인 실뱅 로시뇰에게 의뢰를 하여 이루어진 작업의 결과물이다. 실뱅 로시뇰은 협회의 도움을 받아 로밍밸의 노동자들을 인터뷰하고, 그 인터뷰의 결과물로 인물들을 창조하고, 이들을 통하여 로맹빌의 역사를 그리고 현재를 기록하였다.


“... 지식은 금방 구식이 되지만 성찰은 그렇지 않다. 미국인들은 이러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꽤 두꺼운 소설이지만 첫 부분을 잘만 통과하면 독서에 속도를 붙일 수 있다. 딱히 노동 운동에 관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들의 생활 속에서 촘촘하게 발견되는 귀한 성찰들은 우리가 가지는 현재적인 지식의 속절없음을, 신자유주의라는 이름하에 마치 신성한 것이라도 된다는 듯 모두를 옭아매는 우상화된 시장 법칙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고 할 수 있는 소설이다.


어쩔 수 없는 흐름이라는, 협박에 다름 아닌 변명과 함께 자꾸만 우리를 무릎 꿇게 만드는 금융자본 주도하의 신자유주의 시대는 정점으로 치닫고 있고, 우리들은 이렇게 소설로만 남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 공장은 소설이다, 라는 제목은 우리 공장은 전설이다, 라고 읽힌다. 현재 진행형이라고 외친다고 해도 마치 전설로 남은 무언가를 읽었다는 느낌이니 마냥 개운하기만 한 기분은 아니다.



실뱅 로시뇰 / 이재형 역 / 우리 공장은 소설이다 (Notre usine est un roman) / 잠 / 2011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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