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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노 게이치로 《일식》

장중한 의고체 문장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서사의 재미라는 것도 필요하니..

by 우주에부는바람

*1999년 4월 16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장중한 의고체 문장에 실려 다가오는 엄청난 전율의 해일, 이라는 선전 문구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읽기에 나쁘지 않다. 이것저것 크고 작은 시간과 공간의 탐색을 통한 자료의 수집, 너무 무겁게 또는 더 무겁게 하여 스스로를 가라앉히는 우를 범하고 있지 않으니 보기에도 좋다. 일본의 작가들이 가지는 사소설적이고 감상적인 분위기에서 탈피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쁘지 않다.

의고체라고 했는데 어차피 번역이다보니 원문의 문장이 가지는 진중함을 알아차리는 것이 쉽지는 않다. 다만 사용되는 단어의 진중함 정도는 느낄 수 있다. 예를 든다면 도회 (재능이나 학식을 숨겨 감추는 태도), 회삽 (어려워 그 뜻이 명료하지 않음), 행혜 (자주 다녀 생긴 산 속의 길), 회닉 (그믐달이 광채를 거의 감추고 아주 조금만 내비춰주듯이 재주를 감추고 어리석은 체함) 과 같은 단어를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소설 속의 서사가 주는 재미가 강하지는 않다. 혹자는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 운운하기도 하지만, 어차피 다른 문화권의 이야기를 그것도 자료 조사를 토대로 하여 쓰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터이다. 추리적인 요소가가미되어 있기는 하지만, 소설 속 피에르 뒤페나 피에르 뒤페의 안드로규노스나 그 안드로규노스의 화형 장면 같은 것은 좀 심드렁하게 읽힐 뿐이다. 대신 중군중간 등장하는 연금술이나 마녀에 대한 부분은 관심이 가서 꼼꼼히 읽는다.


히라노 게이치로 / 양윤옥 역 / 일식 (日蝕) / 문학동네 / 222쪽 /1999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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