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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인간 존재의 근원에 관한 유쾌한 통찰...

by 우주에부는바람

오랜만에 굉장히 재밌는 책을 읽었다. 영화로 치자면 마땅히 별 다섯 개를 주고, 반 개쯤을 더 주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랄까... 처음에 아내가 이 책을 들고 왔을 때 나는 내가 이미 읽은 책이러니 생각하고, 책장을 한참 뒤졌는데 보이지 않았다. 입이 마르고 닳도록 재밌다,를 연발하는 아내의 호들갑을 의아하게 여기며 첫 번째 권을 잡아 들었는데 그 밤에 다 읽어버렸다. 그러고는 결국 두 번째, 세 번째 권을 읽는 아내에게 빨리 읽으라 재촉을 했다면 믿으시려나... 우리나라에서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제목의 세 권짜리 소설로(각권의 제목은 비밀 노트, 타인의 증거, 50년간의 고독으로 되어 있다) 나와 있지만(93년도에 초판이 발행되었다), 원래는 『커다란 노트』(1986), 『증거』(1988), 『세번째 거짓말』(1991)라는 제목으로 시차를 두고 출간되었다.


“우리가 ‘잘했음’이나 ‘잘 못했음’을 결정하는 데에는 아주 간단한 기준이 있다. 그 작문이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들, 우리가 본 것들, 우리가 들은 것들, 우리가 한 일들만을 적어야 한다... 예를 들면 ‘할머니는 마녀를 닮았다’라고 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마녀라고 부른다’라고 써야 한다... ‘이 소도시는 아름답다’라는 표현도 금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소도시는 우리에게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추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당번병은 친절하다’라고 쓴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당번병이 우리가 모르는 심술궂은 면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만 써야 한다. ‘당번병은 우리에게 이불을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또한 ‘호두를 많이 먹는다’라고 쓰지, ‘호두를 좋아한다’라고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좋아한다’는 단어는 막연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정확성과 객관성이 부족하다...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매우 모호하다. 그러므로 그런 단어의 사용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사물,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 즉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만족해야 한다.”


쌍둥이 형제가 어머니 손에 이끌려 시골의 할머니집에 맡겨지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갖은 구박을 받는 이 쌍둥이 형제는 자기들을 위한 자기들만의 방법으로 자기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유년기를 지낸다. 위의 글은 그들의 놀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노트에 글쓰기, 그 방법론을 적어 놓은 것인데, 실제 첫 번째 권의 소설은 저 방법론에 철저히 입각해 있다. 내가 기억하기로 단 한 번도 감정을 주입시킨(설령 주입시킨다고 하더라도) 문장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짧고 서늘하고 간간히 소름이 끼치도록 객관적일 따름인 묘사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소설은 미치도록 재밌다.


하지만 이처럼 순진무구한 재미를 느끼는 것은 첫 번째에서 끝이다.(이쯤에서 덧붙이자면 비밀 노트라는 제목이 붙은 첫 번째 소설만을 읽어도 좋겠다. 두 번째 세 번째 소설을 읽다보면 커다란 미궁에 빠진 것처럼 아찔해져버리고 만다. 뭐, 그런 걸 즐긴다면 세 권을 모두 읽어도 좋지만...) 타인의 증거, 라고 이름 붙여진 두 번째 소설은 첫 번째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헤어진 쌍둥이 형제의 한 쪽, 국경을 넘지 않은 루카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세 번째 소설에서는 루카스와 클라우스, 국경을 넘었던 클라우스와 국경을 넘지 않았던 루카스가 소설의 앞 부분과 뒷 부분을 차지하고, 그들은 소설의 말미에서 만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이 모든 것은 거짓말에 불과했다. 내가 이 마을에서 할머니 집에 살 때 분명히 나 혼자였고, 참을 수 없는 외로움 때문에 둘, 즉 내 형제와 나라는 우리를 상상해왔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거짓말일까? 아니라면, “소년은 조서에 서명을 했다. 거기에는 세 가지 거짓말이 적혀 있었다... 국경을 같이 넘은 남자는 그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이 소년은 18세가 아니고, 15세이다... 이름은 클라우스(Claus)가 아니다.”라고 말했듯 딱 세 가지만 거짓말일까?


무언가 소설의 이야기를 하게 되면, 스포일러가 되고 말테고 그렇다고 아무말도 덧붙이지 않자니, 이 재밌는 소설을 소개하는데 소홀하게 될까 두렵다. 환상적이면서도 그지없이 리얼하고, 철저하게 묘사로만 이루어져 있음에도 가슴이 묵지근한 심리적 통증을 느끼게 되며, 인간 존재의 근원과 전쟁 혹은 한 인간의 유년과 한 인간의 전생애가 맺는 관계에 대한 철저한 통찰이 가득한 소설을 참 잘도 썼다, 덕분에 잘 읽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 / 용경식 역 /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전3권) / 까치 / 1993 (1986, 1988,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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