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건조하게 조금씩 나아가는 문체...
*1999년 4월 23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나와 나의 아내 쥘리에트는 평생의 소원이었던 우리집을 찾아 이사를 했다. 평생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가르쳤던 나는 이 집이 평생 소원했던 바로 그 집임을 의심하지 않았고 당장 우리집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우리집이 주는 평안함 뒤에는 어떤 음험함이 기다린다. 불청객 탓이다. 시골 도시, 그 시골 도시의 외딴 곳에 위치한 위리집은 바로 옆에 단 한 채의 이웃집을 두고 있는데, 바로 그 이웃이 문제다.
베르나르댕은 매일 오후 네 시가 되면 우리집을 방문한다. 아주 최소한의 대답만 하고 돌아가는 베르나르댕. 처음엔 일종의 사교적 방문이라고 여겼던 것이 하루, 이틀, 사흘 계속되면서 우리집의 나와 쥘리에트는 겁을 먹는다.
그런 일이 지속되던 어느 날 나와 쥘리에트는 베르나르댕씨의 부인인 베르나데트를 만나게 된다. 소설 속의 표현을 빌리자면 도저히 인간의 그것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그저 살덩어리에 불과한 베르나데트 앞에 압도당하고 역겨워한다. 하지만 식사 시간에 베르나데트의 식욕을 무참하게 막아버리는 베르나르댕에게 분개하고 만다.
그 다음부터는 우리집의 나와 쥘리에트, 그리고 베르나르댕 사이에 일종의 전투중인 듯한 전선이 형성된다. 나와 쥘리에트는 베르나데트가 보다 인간적인 삶을 살도록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 사이 베르나르댕은 자살을 한 번 시도하고, 결국은 나에게 살해당한다.
프랑스 현대 작가들은 끔찍한 상황을 설정하고 그 사이사이 건조한 문장을 구겨 넣고, 또 이러한 상황과 문장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야기 하고자 하는 하나의 경향이라고 가진 것일까...
<그러므로 기억이란 사막의 넥타이 장수와도 같다. "물이요? 아니오, 물은 없습니다. 하지만 넥타이라면 온갖 종류를 다 갖고 있습니다." 이 경우가 바로 그렇지 않은가. "압제자에게 벗어날 방도요? 전혀 떠오르는 게 없군요. 하지만 오래전에 당신을 그토록 매혹했던 그 가을 장미를 떠올려보신다면...">
자신이 처한 딱한 상황을 돌파하기를 원하는 소심한 사람이 겨우 생각해낸 것이 위의 문장 정도라는 사실... 돌파구 없는 현대인의 상황을 나타내듯, 제대로 된 과거를 간직할 수 없는 원천징수당한 추억을 향한 문장으로 너무나 유효적절했던 문장이다.
아멜리 노통 / 김남주 역 / 반박 (Les Catilinaires) 또는 오후 네 시 / 188쪽 / 1999 (1995)
ps. <반박>이라는 이름으로 1999년 출간되었으나, 2001년에는 <오후 네 시>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