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맺어짐이 아닌 사랑의 꺾임을 향한 파괴적인 접근...
*1999년 4월 4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일본, 베이징, 뉴욕, 방글라데시, 보르네오, 라오스 등지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고 하는 작가의 히스토리의 영향일텐데, 소설의 배경은 바로 중국이다.
도입부에 비트겐슈타인의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라거나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 같은 명제가 등장하기에 뭔가 범시간적이고, 범공간적이 등장하려나 잔뜩 움츠러 들었는데 소설은 의외로 쉽고 명쾌하다.
등장인물의 나이가 어린 소녀라는 점은 소설의 명쾌함을 직접적으로 떠받치고, 이 소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모국의 자궁과도 같은 평안이 아니라 이제 막 그것을 벗어난 태초의 무엇을 향해 혼돈을 거듭하는 이국 땅의 어느 한 곳이라는 점은 소설의 명쾌함을 은밀하게 두둔한다.
하지만 결국 소설의 정점은 사랑의 파괴라는 한 곳으로 모여지는데, 어린 소녀간에 싹이 트고 그 싹이 잔인하게 꺾임에도 불구하고 그 잔인한 꺾임을 파괴에 국한시켜서 보지 않는다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든다.
그 마지막 사랑의 꺾임이 도드라지기 직전에 나오는 문장, "그 애는 절묘한 방법으로 울고 있었다. 눈물은 아름다움을 해치지 않을 만큼 조금 흘러 나왔고, 두 눈을 뜨고 있어서 아름다운 눈 속에서 서서히 차 오르는 눈물을 볼 수 있었다."와 같은 문장은 군더더기가 없이 매끈하게 자신의 할 말을, 비록 어린 아이의 입을 빌리기는 하지만, 가차없이 뱉어버리고 만다.
어린 소녀의 내면 상황을 정밀하게 보여주며 사랑의 파괴적 힘에 대하여 가하는 성찰, 그리고 그 전쟁, 평화, 피해의식, 끊임없는 모욕, 권력, 긴장감의 유지도 돋보인다. 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비린내가 풍길 정도로 날 것으로 교배시킨 작가의 힘에 건배를 보낸다.
아멜리 노통 / 김남주 역 / 사랑의 파괴 (Le Sabotage amoureux) / 열린책들 / 181쪽 / 1999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