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혼란스러운 감정의 궤적, 그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따라서...
오래 전부터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인데 이제야 들춰 읽는다. (아니면 결혼 후 우리집으로 옮긴 아니의 책 중에 한 권인지도...) 츠바이크의 소설집인데 뒤에 실린 해설을 읽어보자니 그의 세 권의 소설집에서 솎아낸 네 편의 소설이 실려 있는 셈이다. 1911년 발간된 《최초의 체험 Erstes Eflebnis》에서 뽑은 <황혼이야기>, 1923년 발간된 《정열의 소설 Amok》에서 뽑은 <달밤의 뒷골목>과 <모르는 여인의 편지>, 그리고 1926년에 발간된 《감정의 혼란 Vewirrung der Gefühle》에서 뽑은 <감정의 혼란>이라는 발표된 연대의 역순으로 실려 있다.
「감정의 혼란」.
실려 있는 다른 소설들보다 길다. 중편 소설 정도의 분량이다. 방탕하게 시작된 대학 신입생의 시절 이후, 아버지와의 충돌 이후 자리를 옮긴 학교에서 마주치게 된 문학 교수에 대한 젊은 흠모가 길고 지루하게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나도 자네를 사랑하네!”
라는 교수의 말을 듣고 난 이후 지금까지 모든 상황들이 다시금 리와인드된다.
“그것은 여자로부터도 여지껏 받아 본 적이 없는 키스, 죽음의 부르짖음과 같이 격렬하고 절망적인 키스였습니다. 그의 육체의 경련이 내게 전달되었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몸을 내맡기면서도, 남성에게 접촉된 육체의 불쾌한 촉감에 마음 속 깊이 겁을 내면서 이상야릇한 이중의 감각에 사로잡혀 몸을 떨었습니다. 숨막힐 듯한 순간을 계속적인 마비 상태로 연장시키는 것 같은 감정의 혼란이었습니다.”
이제 스스로 노교수가 되어 자신을 기념하는 논문집을 받아든 그 순간에, 스스로 되돌아보는 자신의 현재를 만들어준, 그러나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인생의 한 순간에 대한 마지막 토로와도 같은, 자신의 혼란스러웠던 감정의 유일한 버전이기도 한 기억에 대한 이야기이다.
「달밤의 뒷골목」.
한 여인에게 상처를 주었던 한 남자... 이제는 완전하게 관계가 역전된 두 사람 사이에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이국의 도시의 항구에서 우연히 자신의 고향의 노래를 듣게 된 것을 시작으로 하여, 이 남자로부터 그간의 모든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애초에 자신의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던 한 남성이 자신의 여자가 떠난 이후에 드디어 그 사랑의 의미를 알게 되었으나, 막상 그것을 알아챈 다음에는 그 여자를 차지할 수 없어, 노예처럼 끌려 다녀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이 남자는 품에 단도를 숨긴 채 이 여인이 있는 술집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모르는 여인의 편지」.
얼마전 <낯선 여인의 편지>라는 제목의 이 소설을 읽었다. 그때 쓴 정리를 다시 한 번 옮기자면 이렇다.
『어느 날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되는 유명 소설가 R. 그 편지에는 자식의 죽음에 애통해하는 한 여인, 그리고 곧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로 작정한 여인, 그리고 그 평생에 걸쳐 한 남자를 사랑했던 한 여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 한편으로는 밝고 세상을 향한 열린 면을 보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당신 혼자만 알고 있는 아주 어두운 면을 보이지요. 이 깊고 깊은 양면성, 이것이 바로 당신이라는 존재의 신비입니다. 이것을 제가, 열세 살짜리 여자애가 첫눈에 알아보고 마법같이 끌렸습니다.”
이 여인은 열세 살, 빈민가 한 귀퉁이에 있는 자신의 앞집에 작업실을 만들고 들어선 이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소녀의 사랑은 시작된다. 말 한 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했지만 소녀는 열렬히 그를 사랑했고, 그렇게 삼년이 흐른다. 하지만 그녀의 엄마의 재혼과 함께 소녀는 이 남자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인 그 집을 떠나게 된다.
“... 전 당신에 관한 한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습관, 당신의 넥타이, 당신의 양복을 다 알고, 당신의 지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구별할 수도 있었으며, 누가 내 마음에 들고 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도 나누었지요. 열세 살부터 열여섯 살까지 매 순간 당신 속에 살았답니다...”
하지만 그녀는 열아홉이 되어 다시금 그 남자가 살고 있는 도시로 돌아온다. 그리고 드디어 그 남자의 손에 이끌려 그토록 자신이 들어가보고 싶었던 그의 작업실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관계를 갖고, 그 남자는 다시금 떠난다. 한 번의 관계에 잉태를 한 여자는 아이를 낳았고, 아이를 기르기 위해 남자들을 만난다. 그렇게 남자들과 드나들던 클럽에서 여자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그 남자를 만나지만, 그 남자는 그 마지막 만남에서도 그녀를 그 전의 모습, 열세 살 소녀의 모습, 혹은 열아홉 살 처녀의 모습으로 재생시키지 못한다. 그리고 그 남자는 다시 떠난다.
“제가 사랑했던 남자도 늘 떠났습니다... 떠난 사람은 다시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래요, 떠난 사람은 돌아오겠지요. 하지만 모든 것을 잊는답니다.”
물론 그녀의 편지 속의 그 남자는 바로 이 편지를 받은 유명 소설가 R이고 그녀가 얼마전에 잃은 아이는 R의 아들이다.』
「황혼이야기」.
우연히 알게 된 하나의 이야기... 친척집에서 머물며 함께 지내게 된 세 명의 누이들... 그 중 한 명이 밤이면 밤마다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아직 소년인 내게 다가와 운우지정을 나누게 된다. 그리고 소년인 나는 그것이 밀고트라고 여겨 그녀를 향하여 자신의 사랑을 보낸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된 실상은 그것이 밀고트가 아니라 엘리자베스라는 것,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자신에게 사랑을 보내지만 나의 사랑의 화살은 이미 밀고트를 향해 출발한 뒤이다.
“... 그는 연애라든가 여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런 관심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어 버렸다. 그것은 그가 인생의 한 순간에,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의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경험했기 때문에, 불안스럽게 내미는 소년의 떨리는 손 위에 너무나 일찍이 굴러들어온 사랑의 열매를 두 번 다시 맛보고자 하는 욕망이 사라져 버린 까닭이다.”
원효 대사의 해골바가지 속 물이 이 소년에게는 팔찌에 달린 팔각형의 펜던트였으니 어찌할 수 없는 욕망의 뒤범벅은 서양이건 동양이건 과거이건 현재이건 여전한 법이다.
슈테판 츠바이크 / 박찬기 역 / 감정의 혼란 (Vewirrung der Gefühle) / 깊은샘 / 320쪽 / 1996 (<감정의 혼란> 1926, <달밤의 뒷골목> 1923, <모르는 여인의 편지> 1923, <황혼이야기> 1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