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흡입력으로 대중을 끌어당기면서도 문학의 도리를 잃지 않는...
연일 츠바이크를 읽는 것이 무리이다 싶어 잠시 딴청을 부리기로 했다. 그렇게 폴 오스터의 책을 슬쩍 집어들었는데, 무슨 내용인지 앞 페이지만 조금 읽자고 덤벼든 것이 새벽의 잠까지 몽땅 덜어내며 전부 읽고 말았다. 츠바이크의 묘미도 묘미이지만, 폴 오스터 또한 글쓰기에 있어서 또다른 경지에 올라 있는 작가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읽고 있던 츠바이크의 소설은 잠시 뒷전으로... 그렇게 폴 오스터...
“나는 1967년 봄에 그와 처음으로 악수를 했다. 당시 나는 컬럼비아 대학 2년생이었고 책만 좋아할 뿐 아무것도 모르는 숙맥이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1967년 봄 애덤 워커를 주인공으로 하여 1인칭의 소설은 시작된다. 그리고 시인이 되기를 열망하던 젊은 학생이던 나는 우연히 참여하게 된 파티에서 교환 교수로 와 있는 루돌프 보른, 그리고 보른의 옆에 함께 있는 마고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리고 이들 두 사람의 은밀한 유혹과 보른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루어진 마고와의 불꽃 같은 섹스...
“... 내 인생은 루돌프 보른이 세드릭 윌리엄스의 배를 칼로 찔러 댄 1967년 봄밤에 시작되었다고 생각해...”
하지만 마고와의 사이를 눈치 챈 보른이 마고를 프랑스로 보내고, 두 사람의 의기투합 속에서 발행키로 한 문예 계간지를 출범시키기로 합의를 본 그 봄밤에 루돌프 보린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나에게 보이게 되고, 결국 나는 보른과의 결별을 선택한다. 살인을 저지른 보른은 본국으로 귀환하고 나는 미국에 남아서 자신이 막지 못한 살인에 대한 죄의식 속에서 뜻밖의 선택을 하게 된다.
소설의 2부는 갑작스럽게 애덤 워커의 편지를 받은 소설가 짐의 시점으로 시작된다. 시기 또한 소설의 1부가 시작되던 1967년에서 2008년으로 훌쩍 옮겨 온 상태이다. 사실은 1부에 실린 소설 또한 실은 워커가 짐에게 보낸 편지 속에 동봉된, <봄>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원고였음이 밝혀지고, 워커는 사실 죽음을 앞둔 말기 암 환자이다. 워커는 글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중이며, 소설가인 짐에게 그러한 글쓰기에 도움을 받고 있는 중이다.
“... 나는 나의 접근 방법이 틀렸음을 알았다. 나 자신을 1인칭으로 서술함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질식시켰고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내가 찾고 있던 것을 찾는 게 불가능해졌다.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떨어트릴 필요가 있었고 한 걸음 물러서 나 자신과 나의 주제(바로 나 자신) 사이에 약간의 공간을 두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2부의 시작으로 다시 돌아가 3인칭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2부에 실린, 1부에서 이어지는 소설은 <여름>이라는 제목으로 워커에 의해 다시금 짐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여름>은 2인칭의 시점에서 보른이 떠난 이후 미국에 남겨진 애덤이 자신의 아름다운 누이인 그윈과 한 집에서 사는동안 있었던 근친상간에 대한 기록이다. 자신의 부도덕했던, 하지만 그 부도덕조차 토로해야만 하는, 삶의 마지막을 지척에 둔 워커는 그것조차도 짐에게 보낸다.
그리고 3부에 이르러 드디어 짐은 워커의 집을 방문하게 되지만, 이미 며칠 전에 워커는 숨을 거둔 뒤이다. 짐은 워커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의 의붓딸인 레베카를 통하여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기록한 메모를 전달받고, 소설가라는 자신의 직분을 살려 그 메모에 살을 붙여 <가을> 부분을 작성한다. <가을>은 누나와의 짧았던 마지막을 뒤로 한 채 프랑스로 떠나는 부분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보른과 마고가 살고 있는 프랑스에 교환 학생으로 입국한 나는 허름한 방 한 칸을 얻고 글쓰기에 전념할 생각이지만 결국 마고에게 연락을 하게 되고 뒤이어 보른과도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보른이 결혼을 작정하고 있는 엘렌 쥐앵가 그녀의 딸 세실 쥐앵을 소개 받는다. 67년 봄의 살인을 잊지 못하고 있던 나는 보른의 결혼을 막는 것이 자신이 취해야 할 복수의 행동이라 여기고 실행에 옮기지만, 그 과정에서 애틋하였던 세실의 사랑을 짓밟는 파렴치한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모든 것을 정리하는 시점이어야 할 4부에 다다르지만 그윈 워커가 애덤 워커의 소설 속 사건들 중 일부를 부인하면서 소설은 또다른 혼돈 속으로 빠져든다. 6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세실 쥐앵이 루돌프 보른을 방문하면서, 루돌프 보른의 정체에 대해서는 일말의 힌트를 얻게 되지만 지금까지 독자인 내가 읽고 본 것들에 대해서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베트남전 반대가 한창인 미국, 그리고 68혁명의 와중에 있는 프랑스... 이렇게 두 공간을 오가며 진행되는 사건들은 베트남전과 68혁명이라는 거대한 사건들과는 무관한 듯 하지만 또 묘하게 맞물려 돌아간다.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바랬던 한 청년의 멀쩡해보이는 외피 속에 도사리고 있는 음험한 성은 피할 수 없었던 냉전의 이데올로기를 닮았고, 이러한 사건을 훑고 지나가는 짐은 관찰자로서 남아 있는 현재의 우리들을 닮아 있다. 폴 오스터의 소설은 그렇게 대중적인 흡입력으로 강하게 독자를 빨아들이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문학적 도리를 잃지 않는다.
폴 오스터 / 이종인 역 / 보이지 않는 (Invisible) / 열린책들 / 333쪽 / 2011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