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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혼비 《딱 90일만 더 살아볼까》

12월 31일 옥상에서 만난 자살 그룹의 좌충우돌 자살 유예의 기록...

by 우주에부는바람

닉 혼비의 가공할만한 캐릭터 구축 능력을 보여주는 소설이라고나 할까. 흔하지 않은 사람들이 흔하지 않은 상황에 처하면서 시작되는 소설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 네 명의 주인공들에게 서서히 동화되어 가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은 네 명의 주인공이 12월의 마지막 날 토퍼스 하우스라는 건물의 옥상에서 만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소설은 이들 네 명의 각각의 입을 통하여 따로따로 전달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헷갈리는 일 없이 어찌나 잘 읽히는지... 이 또한 아마도 각각의 캐릭터가 가지는 존재감의 영향이 아닐까.


그 운명의 날 처음 토퍼스 하우스에 올라간 것은 마틴이다. 유명한 토크쇼의 주인공이었던 마틴은 한 소녀와 성관계를 맺었는데, 그녀가 115일이 모자란 미성년이었던 커다란 스캔들이 되어 신문의 일면을 장식하게 되고, 교도소에서 실형을 살게 되었으며 주류 방송들에서는 완벽하게 퇴출을 당하고, 아내와 딸들로부터도 외면을 당한 채 결국 옥상에서 투신을 할 작정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틴은 투신 전에 술을 한 잔 하고 있다가 뒤이어 도착한 모린을 만나게 된다. 50대의 여인인 모린은 젊은 시절의 한 번의 실수로 아이를 가졌고, 그 아이가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중증의 장애아를 낳았다. 이후 모린은 지금까지 직업도 한 번 가져보지 못한 채 온통 자신의 아들 매티를 돌보는데 자신의 인생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질긴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작정을 하러 옥상에 올라왔으나, 옥상을 둘러싼 철조망 탓에 이미 철조망을 넘어간 마틴으로부터 사다리를 빌릴 참이다.


“그때 모든 것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외로움의 무게, 잘못된 모든 것의 무게. 그 무거운 짐을 지고서 마지막 몇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무슨 영웅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짐을 벗어버리는 유일한 방법, 그 짐이 내게 해로운 짓 대신 이로운 짓을 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뛰어내리는 것밖에 없는 것 같았다. 몸이 너무나 무거워서 금세 길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고층 아파트에서 떨어지는 속도로 세계 신기록을 내고도 남았을 것이다.”


마틴이 모린을 철조망 너머로 보내기 위해 이쪽으로 넘어와 있는 동안 전속력으로 옥상을 가로지른 것은 제스이다. 하지만 결국 제스는 마틴의 제지에 막혀 옥상에 자빠뜨려진다. 잘 나가는 부모를 둔 제스는 이와 상관없이 막 나가는 인생을 살고 있고, 거기에는 어느 날 사라져버린 언니 젠, 이라는 요인이 도사리고 있다. 이 열여덟 살의 막무가내 아가씨 제스는 그렇게 세계 신기록의 속도로 뛰어내릴 수 있는 기회를 마틴의 엉덩이 때문에 잃게 된다.


그리고 이 자살반상회의 마지막이자 네 번째 참가자는 미국인인 피자 배달부 제이제이다. 록 가수의 꿈을 안고 음악을 만들어왔지만 결국 밴드의 맴버인 에드와의 싸움 끝에 밴드는 해산되고, 여자 친구인 리지마저도 떠나버린 제이제이는 배달 중인 피자를 든 채로 옥상에 올라온다. 네 명 중 가장 약한 자살 이유를 가졌던 제이제이는 거짓으로 자살의 이유까지 만들어내며 이들 자살 실패자들의 모임에 합류하게 된다.


“... 우리, 토퍼스 하우스의 4인에게 그런 식의 논리는 먹혀들지 않았다. 우리는 정확히 말해, 엉망진창의 왕과 여왕들이었다. 채스는 섹스를 포기했지만, 우리는 염병할 인생을 포기할지 말지 정하는 중이었으니까.”


그렇게 이들은 애초의 의도였던 자살을 포기하고 옥상 아래로 내려온다. 그리고 그들은 제스가 불끈하여 옥상에 올라오도록 만든 원인이었던 채스를 찾아 도시의 파티 장소를 찾아다니고 결국 채스를 찾고, 제스와 채스가 헤어지는 것을 돕고 6주가 되기 전까지는 더 이상 자살을 시도하지 않기로 합의를 한다. 하지만 이렇게 헤어진 다음 날 이들의 회합은 또다른 국면으로 발전한다.


이들 네 사람이 만났던 채스가 이들 자살 그룹의 일을 신문사에 이야기하고, 이들 중 가장 망나니였던 제스의 아버지가 교육부 장관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이들은 얼렁뚱땅 옥상에서 맷 데이먼을 닮은 천사를 만나 자살을 포기했다는 시나리오를 만들고, 모린을 위하여 네 사람의 휴가를 떠나고, 그곳에서 다시 대판 싸우고 돌아온 다음에는 결국 다시금 옥상에서 만나고, 그곳에서 자신들처럼 뛰어내릴 작정을 하고 앉아 있는 한 남자를 목격하게 된다.


물론 그래서 이들은 이 남자를 설득하고, 이들의 그러한 설득 사실이 매스컴에 알려지면서 새로운 도시의 소시민 영웅이 된다, 라는 식의 전개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닉 혼비는 딱 닉 혼비스럽게도 그 옥상에서의 남자를 그대로 땅 밑을 떨어뜨린다. 그리고 자신들이 시도하려다 실패한 바로 그 일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실행에 옮긴 자살자 앞에서 이들은 다시 한 번 혼란에 빠지게 된다.


“옥상에서 몸을 던진 남자는 우리에게 두 가지 심오하고도 모순되는 영향을 미쳤다. 우선, 그는 우리에게 자살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둘째, 그 사실을 안 우리는 다시 자살하고 싶어졌다.”


결론만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일단 이들은 90일이 지난 뒤에도 아직 살아 있다. 그 사이 이들은 자신을 이르게 만든 문제들 혹은 그러한 문제들과 얽혀 있는 주변인들과 조우하는 그룹 미팅까지 거치게 된다. 연령도 성별도 사회 계층적 구분에서도 전혀 접점이 없는 이들 자살 그룹의 네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거나 으르릉거리거나 오해하는 이야기들도 끝까지 이어진다.


“대단한 사람이 될 줄 알았는데, 이제 별 볼일 없는 인간인 것이 확실해진 거지. 예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재능도 없고, 그것 말고는 제2의 계획도 없고, 기술도 없고, 졸업장도 없고, 이제 아무 희망도 없이 4~50년을 살아야 하는 거야. 아무 희망도 없는 정도가 아닐지도 몰라. 그건 꽤 심각하다고. 그건 뇌에 무슨 병이 든 것보다 더 나빠. 지금 이 상태로는 죽는 데 더 오래 걸릴 뿐이니까. 당신은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어가든지, 아니면 고마운 마음으로 얼른 죽어버리든지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해.”


그래도 죽는 것 보다는 살아 있는 것이 더 낫다, 라는 계몽은 닉 혼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아직 죽지 않았고 당장은 자살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이들 자살 그룹은 어느 순간 다시 한 번 옥상에 올라서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직면하는 순간, 그들은 소설 속의 시간 90일을 떠올리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자살을 포기할지 모른다. 그래 조금만 더 살아볼까, 라고 여기면서 자신의 죽음을 유예하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유예의 순간이야말로 때때로 또다른 희망의 시작이기도 한 것이다.



닉 혼비 / 이나경 역 / 딱 90일만 더 살아볼까 (A Long Way Down) / 문학사상사 / 399쪽 / 2006, 2010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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