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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Sep 26. 2024

《받아쓰기 : 내가 머문 아이오와 일기》김유진

너무나도 확연한 기록들이 날짜순으로 촘촘하게 도미노처럼...

  소설가 김유진의 아이오와 국제 창작 프로그램 참가기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의 많은 작가들이 이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것으로 안다. 최승자와 한강은 《어떤 나무들은 - 아이오와 일기》 (산문집에는 ‘내가 머문 아이오와 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이것은 최승자의 산문집에 붙은 ‘아이오와 일기’라는 부제를 염두에 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그곳에서의 생활을 이미 기록한 적이 있다. 《누구나, 이방인》이라는 기획 산문집에 실린 이혜경의 글 또한 이 프로그램과 그곳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이오와 국제 창작 프로그램(International Writing Program)은 1967년 시작된 아이오와 시 주관의 문학 레지던스 프로그램이다. 2015년엔 33개국에서 34명의 시인, 소설가, 번역가가 참여했다. 2015년 8월 22일부터 11월 11일까지, 작가들은 아이오와 대학교 내의 같은 호텔에 머물며 창작과 토론, 낭독회 등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산문은 그곳으로 출발한 2015년 8월 21일 금요일에 시작되고, 2015년 11월 11일 수요일에 끝이 난다. 그리고 작가의 말이 2016년 12월 23일 금요일에 씌어졌다. 산문은 굉장히 평면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 적는다. 자신이 맞닥뜨린 상황이나 자신이 만난 사람에 대해 적을 때도 꽤나 주관을 배제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 면에서 여타의 산문집들과는 약간 결이 다르다.


  “... 마리는 그때마다 듣도 보도 못한 작가들의 작품을 소리 높여 추천하곤 했다. 나는 그녀의 추천 목록 중 가장 상위에 올라 있는 차학경의 책을 빌리러 도서관으로 향했다. 테레사 차로 외국에 알려진 그녀의 이름을 얼핏 들어본 적은 있지만, 작품을 보진 못했었다. 그녀는 나이 서른에 뉴욕에서 불시에 사망했다. 책 제목은 『받아쓰기 Dictee』, 영와와 불어가 혼재되어 쓰였다고 했다. 그러나 도서관에 있던 세 권의 책은 모두 대출중이었다.” (pp.50~51)


  이런 면모는 심지어 산문집의 제목인 ‘받아쓰기’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에서도 드러난다. 작가는 함께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있는 스웨덴의 시인 마리로부터 차학겨의 《받아쓰기》라는 책을 추천받았다, 라고만 적고 있다. 그 책의 어떤 면 때문에 이 산문집의 제목으로 삼는다거나 하는 사족을 달지 않는다, 산문집의 마지막까지. 대신 독자인 한국을 떠나 하와이와 캘리포니아를 거쳐 뉴욕에서 활동하고 사망한 작가 차학경의 이력과 한국이 아닌 그곳 아이오와에서 낯설게 생활하고 있는 현재의 작가 김유진을 알아서 오버랩시켜 볼 뿐이다.


  “조금씩 피곤해진 우리를 태우고 버스는 사과 농장으로 향했다. 언덕 위로 빼곡한 사과나무를 따라 걸으며, 한 알씩 따 먹었다. 나무둥치 주변으로 누구도 따지 않아 자연스레 낙과한 사과들이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각기 다른 크기, 다른 색, 아마도 다른 향과 다른 맛을 지니고 있을 사과들이 즐비했다. 한입 베어 물자 햇빛을 오래 받은 과육이 불에 구운 것처럼 뜨거웠다.” (pp.62~63)


  하지만 그런 건조한 진행과 묘사가 일순 뜨겁게 다가오는 순간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어렵사리 (작가는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편이 아니다) 대화하고 그럼에도 그들과 함께 밥을 먹고 또 함께 움직여야 하는 일정의 연속 중에 문득 자신만의 풍광에게로 접근하기도 한다. 이러한 포착들이 좀더 많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


  “몽골에서는 개가 죽으면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믿는다. 그래서 개가 죽으면 꼬리를 자른다.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p.110)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작가들 사이에서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생활하는 일은 힘겨워 보이기도 하고 흥미로워 보이기도 한다. 오래전 최승자의 글에서는 힘겨움을 좀더, 그리고 한강의 글에서는 흥미로움을 좀더 확인할 수 있었던 같다. 김유진의 글은 그 중간 어디쯤인 것 같은데, 너무도 확연한 기록들이 날짜순으로 촘촘하게 도미노처럼 세워져 있어서, 첫날의 일기를 넘어뜨리면 마지막 날의 일기까지 멈추지 않고 잘도 넘어간다.



김유진 / 받아쓰기 : 내가 머문 아이오와 일기 / 난다 / 218쪽 / 201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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