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롭기 그지없는 침묵의 바이블...
수다스런 세계를 관통하는 침묵의 바이블...
바야흐로 작금의 세계는 누가 뭐래도 과도한 수다의 세계이다. 새벽공기를 가르며 현관문을 노크하는 신문은 컬러풀한 광고면을 포함해 어김없이 수다스럽게 현대인의 아침을 방문한다. TV 속의 아나운서들은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것과 알고 싶지 않은 것을 가리지 않고 수다를 떤다. 인터넷에 연결되는 순간이면 전세계로부터 밀려드는 수다가 이십인치 안팎의 모니터를 통해 여과 없이 전달된다. 언제 어디서고 지인들과 연결이 가능한 유선전화와 무선전화는 쉴새 없이 자신의 수다에 귀기울여달라고 울려댄다. 거리에는 사람들의 머리수만큼 번거롭게 수다가 활보하고, 공공장소는 수다들의 집합소가 되어 폭발할 것처럼 고양되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수다는 날 향해 들이닥치지만 나 또한 수다의 생산자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의사이면서 문필가로 활동한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가 우리에게 큰 감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 책이야말로 21세기라는 거대한 수다의 세계를 관통하는 고귀한 총알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총알을 맞아 죽음에 이르는 것은 헛된 수다일 뿐이니 크게 걱정할 것은 없다. 그리고 수다가 죽음을 맞은 자리에는 침묵의 씨앗이 뿌려진다. 책을 읽는 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거나 잊고 있었던 또는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침묵의 세계가 줄기를 뻗고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운다. 침묵 속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세상은 경이롭기 그지없다. 『반지의 제왕』의 톨킨이 창조한 중간대륙만큼이나 논리적으로 정교하고, SF 소설에 등장하는 4차원의 공간만큼이나 신비로운 침묵의 세계는 펼쳐진다. 제대로 확인해본 바 없지만 태초 이래로 우리보다 먼저 존재해 왔던 세계가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다.
이 거대한 침묵의 전언은 시인 최승자의 번역을 통해 1985년 『침묵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초판이 간행되었다. 1993년에는 『침묵의 세계』라는 원래 제목을 다시 찾으며 같은 번역가의 손을 거쳐 재출간되었다. 그사이 소설가인 윤대녕이나 신경숙, 시인인 고형렬이나 김선우 등 많은 작가들이 이 침묵의 제단에 고개를 조아렸고, 경배를 올리는 일에 언어를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이렇게 고백했다. “세계는 침묵으로부터 탈출했지만 인간의 본질로부터 멀어졌습니다. 나는 소란 속에 있는 침묵에 귀 기울이려 합니다.”(시인 고형렬) “말의 어머니인 침묵을 경청하는 시간이 우리에겐 얼마나 절실한가.”(시인 김선우) “『침묵의 세계』는 세상의 만물이 침묵을 바탕삼아 얼마나 많은 것들을 흡수하는가를 알게 한다. 실리와 유용의 저편에 있는 침묵이 사실은 가장 먼 데까지 퍼져나간 가장 성숙한 존재의 대지라는 걸.”(소설가 신경숙)
책은 Maria-Culm 사원의 제단에 새겨져 있다는 ‘언어는 성스러운 침묵에 기초한다’는 괴테의 문장을 문패처럼 걸어 놓고 시작된다. 그리고 그간 언어라는 그림자에 가려졌던 침묵이라는 빛을 세상에 쏟아 놓는 일침이 계속된다. “침묵은 하나의 독자적 현상이다. 따라서 침묵은 말의 중단과 동일한 것이 아니며, 그것은 결코 말로부터 분해되어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독립된 전체이며, 자기 자신으로 인하여 존립하는 어떤 것이다. 침묵은 말과 마찬가지로 생산적이며, 침묵은 말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형성한다. 다만 그 정도가 다를 뿐이다... 오직 말만이 존재하는 세계는 상상할 수 없지만, 오직 침묵만이 존재하는 세계는 아마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의 등에 업혀 근근이 연명해오던 침묵은 저자에 의해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다.
효율성과 실리, 맹목적인 실증적인 자료들과 이를 뒷받침하는 이성적인 말의 성찬에 가려졌던, 또는 그 배후에 있던 침묵은 책을 통해 차근차근 그 실체가 밝혀진다. “침묵에서 말로, 말의 진리로 떠미는 어떤 경사가 있고, 그 경사의 힘이 진리를 더 멀리, 말로부터 세상의 현실 속으로 떠미는 것이다.” 난 홀린 듯 계속해서 침묵의 세계를 읽기 시작한다. 혹시 너무 빨리 읽어버리면 어쩌나 아껴가면서, 혹시 그가 성스럽게 펼쳐놓는 침묵의 비경을 놓치고 지나가면 어쩌나하는 긴장감 속에서 독서는 진행된다. 자아, 인식, 사물, 역사, 형상, 사랑, 인간의 얼굴, 동물, 시간, 아기와 노인, 농부, 사물, 자연, 시, 조형 예술, 잡음, 라디오, 병과 죽음, 희망, 신앙 등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이 그의 침묵의 은혜를 입고 새롭게 탄생한다. 침묵의 역사와 침묵의 본질과 우리가 알 수 없었던 침묵의 비경들은 그렇게 꿈결인 듯 지나간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한숨을 길게 토해내는데 욕구가 해소되고 마지막 정충을 털어내는 신음 소리를 닮아 있다. 괴테라는 문패에서 시작된 글은 키에르케고르의 외침으로 끝이 난다. “침묵을 창조하라! 인간을 침묵에게로 데려가라. 이렇게는 신의 말씀이 들릴 수 없다. 그리고 소음 속에서도 들릴 수 있도록 소란스런 방법을 사용하여 떠들썩하게 외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신의 말씀이 아니다. 그러므로 침묵을 창조하라!” 성스러운 침묵에 기초한 언어와 그 언어로 창조된 침묵은 저자거리의 외침과는 사뭇 다르다. 침묵은 그 자체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질료가 되고, 침묵은 우주의 기원이 되고, 우리를 쓰다듬는 종교가 된다. 작가는 한치의 틈이나 오차도 없이, 감정의 과잉이나 불분명한 뉘앙스로 얼버무리는 일도 없이, 침묵의 제단을 쌓는 일을 완성시킨다.
세상에는 말이 있지만, 그 말들을 감싸고 있는 침묵의 세상 또한 엄연히 존재한다. 우리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은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들이 신을 본 바가 없어 믿지 못하는 것처럼 그 침묵을 제때 확인하지 못해서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성서의 말씀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처럼 『침묵의 세계』의 언어는 침묵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렇게 『침묵의 세계』는 침묵의 바이블이 된다. 유신론자와 무신론자를 막론하고 말과 침묵의 세계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들 인간을 아우르는 말의 지침서, 침묵의 매뉴얼이 된다. 침묵을 말함으로써 말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말의 겸손을 이끌어낸다. “아기 속에는 어른을 위한, 어른의 소란스러운 세계를 위한 그리고 나중을 위한 예비로서 침묵이 수북히 쌓여 있다.”면서 인간의 시작에 관여한 ‘침묵’을 말하고, “노인의 최후의 말은 그 노인을 삶의 침묵으로부터 저 너머 죽음의 침묵으로 실어가는 한 척의 배와 같다.”며 인간의 마지막을 관장한 ‘말’을 말한다.
『침묵의 세계』는 경이로운 침묵의 바이블이다. 모든 종교는 신의 선한 의지를 설파하여 인간 영혼의 정화를 독려한다. 그래서 『침묵의 세계』를 읽고 이를 주변에 권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죄악이다. 그리고 침묵의 세계를 설명하는 지금의 이 수다는 그 자체로 인간의 원죄이다. 그러니 가혹하지만 어쩌겠는가, 나 또한 이 수다스런 세상의 시민인 것을...
막스 피카르트 / 최승자 역 / 침묵의 세계(Die Welt des Schweigens) / 까치 / 1999 (1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