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숙 《꽃의 기억》

하이텔 문학관에 대한 추억이 어렴풋하고 비현실적인 사랑처럼...

by 우주에부는바람

*1999년 3월 26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작가 후기를 보니 하이텔 문학관에 연재했던 것이라 한다. 그렇게 씌여져 있는 것을 보니 언제 한 번 읽은 적이 있는 것도 같다. 호흡을 짧게 잡아 읽기에는 쉽되 투박하게 보이지 않는 세련으로 무장할 것, 이야말로 팔리는 이제 소설의 기본적인 전략이 된 것일까, 라는 생각이 문득...


이혼하여 따리 하나 있는 큐레이터인 박경진인 나와 내 집에 불쑥 들어와 얼마간을 묵고 간 신지우 사이에 칸막이처럼 놓여진 사랑에 관한 소설이다. 주인공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으로부터 피해망상적일 정도로 억압받고 있으며, 그것은 간혹 섹스에의 유혹, 그리고 그 유혹에의 몰입과 반발 사이의 침울한 갈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큐레이터라는 주인공의 직업 덕에 예술에 대한 작가의 이해의 일면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거간의 내용은 그것과는 별개로 진행되는 편이다. 그러니까 박경진이라는 중년의 사랑이 가지는 헛것과 참된 것, 또는 현실과 비현실, 또는 존재하는 것의 실제감과 존재하지 않는 것의 허투른 실제감, 그리고 사랑하지 않음과 사랑하지 못함 사이에서 꿋꿋하게 또는 끕끕하게 진행되는 일상, 그리고 그러한 박경진의 일상에 소리없이 들어섰던 남자 신진우의 드러나지 않는 무게...


그런데 그 무게는 사랑이었을까. 의심스럽지만 그가 남기고 떠난 노트북 안의 일기 또는 메모는 힌트 아닌 흔티가 되어 박경진을 살풋 건드린다. 마지막까지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는 신진우를 하나의 벽으로 삼이 이쪽과 벽의 저쪽, 이쪽은 분명하게 드러내 소설 안으로 들여보내고 저쪽은 아주 조금만 드러내어 소설 바깥에 남게 만드는 작가의 전략이 좋았다.


책의 전반부에서는 인생률이라는 단어와 슬픈 성기라는 단어를 마주한 채 움찔했지만 소설의 후반부에서는 "나 혼자만 추락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조금씩 속도를 달리하고 있을 뿐이다."라는 박경진의 혼잣말에 비로소 안도했다. 무심코 추락도 상대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절대적인 추락이라는 것은 없다. 내 옆의 누군가를 또는 무엇을 추월하는 추락을 하고 싶을 뿐이다. 어쨌든 추락은 그것이 현실이든, 현실이 아니든 유혹적이다.



김인숙 / 꽃의 기억 / 문학동네 / 245쪽 / 1999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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