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들을 향하여 펼쳐지는 여섯 개의 지난한 사랑의 파노라마...
*1999년 1월 27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한 남자에겐 몇 명의 여자가 필요한가」.
필요한 숫자라는 게 있을까? 필요한 여자가 단 한 명일 수도, 아니면 백 명일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단 한 명의 여자도 필요치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낳아줄 엄마, 사랑을 받아줄 여자, 아이를 낳아 줄 여자, 그리고 아이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사랑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여자까지, 더불어 자신의 임종을 지켜봐주는 여자까지 한 명 있다면... 그렇다면 500%쯤 초과 달성이랄까. 자신의 인생을 따라 사랑했던 여자에 대해 주절거리는 소설, 하지만 남자는 여자에 대한 기대를 버리면서 무위와 자유의 세계로 떠난다.
「여자는 언제까지 사랑을 원할까」.
삼촌의 친구를 사랑했던, 바그너라는 별명의 음악교사를 사랑했던 소녀가 할머니가 되어 자신의 손자에게 말한다. "내 마지막 소원이란다. 난 그냥 한 명의 여자로서 사랑하는 네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 있고 싶구나." 그런데 그리 절실해 보이지는 앟는다. 할머니도 여자인 것이다.
「첫눈 조심」.
눈 내린 벌목장 근처의 선술집, 에서 듣느 ㄴ이야기. 시월 열 하룻날 인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남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가다가 맨 처음 만나는 사내에게서 얻어진 아들. 그리고 그렇게 만난 배냇병신 거렁뱅이의 초라하고 기구했던 일생, 마지막까지 자신과 동병상련을 지닌 아내에 대한 사랑, 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
「내 生에 없는 두 시간」.
수경은 남편과 약속된 오페라 극장에 너무 일찍 도착하고, 그곳에서 오래전 자신의 집을 들락거리던, 이제는 유명한 음악가가 된 남편의 제자를 만난다. 그리고 그 해맑던 남자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그 남자로부터 과거에 자신을 연모했다는 고백을 듣고, 내 생에 없는 두 시간으로 치자라는 생각과 함께 그 남자를 따라 호텔에 갔다 온다. 그리고 자신의 생에 없는 시간으로 친 두 시간에서 남은 이분 동안 오페라 극장 앞의 벤치에서 휴식한다. 자신의 생에서 두 시간쯤 덜어낼 수 있는 행복. 그런 행복은 나머지 시간에 누린 슬픔, 좌절, 회한, 낙담 등에 대해 얼마만한 보상이 될까.
「방문객」.
카프카식 글쓰기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인생극장식 글쓰기라고 해야 하나. 오래전에 한 여자와의 약속을 정해 놓았다가 우연히 그곳에 나가지 않고 절에 들어가 이제는 글쓰는 직업을 가진 한 사내1과 그 사내1 대신 그 여자를 만나러 갔다가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이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고 항변하는 사내2. 두 사내는 나중에 그렇다면 그 우연을 돌려놓자는 합의를 보고, 서로의 자리를 바꾼다. 그 후 그 사내들은 자신의 새로운 인생, 오래전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뒤바뀌었던 상대방의 또는 자신의 다른 인생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지만, 상황 자체는 흥미롭다.
「글라디올러스를 안고 롱아일랜드로 오세요」.
- 인생은 가끔 사랑보다 짧다. 촌철살인같은 말이다. 인생이 사랑보다 짧을 수 있다니. 뉴욕에 엄청난 가격의 아파트를 가진 채 혼자 사는 노인. 그 노인은 항상 글라디올러스를 사서 자신의 집으로 들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브라운이라는 경비원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자신이 죽으면 모든 것은 기부하도록 되어 있지만, 글라디올러스를 꽂아두던 백자 꽃병은 당신에게 줄터이니 편지를 하나 부쳐달라고 부탁한다. - 사랑은 눈물 위에서 춤춘다. 그 노인의 과거. 그느 ㄴ대학에 다니다 한 여자를 알게 되고 그녀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하지만 그녀의 집에서는 둘 사이를 반대하고, 군대에 가 있는 동안 그러한 내용의 통보를 그녀의 오빠로부터 듣게 된다. - 나는 날마다 그대 곁에서 잠들고 싶어요. 그는 그녀에게 묻는다.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그리고 사랑한다는 대답을 듣는다. 하지만 그녀의 집에 들어가 붉은 글라디올러스 화단 앞에서 그녀의 아버지에게 당한 불호령을 입으로 씹어 삼키며 그는 미국행을 결심한다. 그리고 그후 고위 관리의 아내가 된 그녀를 미국의 어느 곳에서 만나게 되고, 언젠가 자신을 찾아와 줄 것을 부탁한다. - 글라디올러스를 안고 롱아일랜드로 오세요. 그 노인은 자신의 젊은 인생을 통째로 바쳐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가 찾아올 것에 대비해 근사한 아파트에서 매일 글라디올러스를 갈아주며 남은 인생동안 그녀를 기다렸다. 그 노인이 죽고 얼마 후 서울발 뉴욕행 비행기를, 글라디올러스를 한 아름 안고 휠체어에 실린 채 한 노인이 타고 있다. 잘 갈아놓은 비수처럼 이쁘고 애린 사랑이야기다.
심상대 / 사랑과 인생에 관한 여섯 편의 소설 / 명경 / 227쪽 / 1998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