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속내 차근차근 드러내는, 사라진 시간들을 향하여 끈질기게 묻고 따지
때때로 헐리우드 영화의 그늘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남미로부터 날아온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영화는 오락이기도 하지만, 내적인 환기를 아우르는 예술의 체취 또한 충분히 가질만한 장르다, 라고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무작정 뛰고 때리고 벗고 입 맞추는 것에 올인하지 않아도, 때깔 좋은 화면에 왁자지껄한 웃음이나 스펙타클이 없어도 영화가 가능함을 상기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는 과거 검사와 함께 일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에스포지토가 과거의 한 사건에 대하여 글을 쓸 생각을 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는 이제 한때 자신이 사랑하였던, 자신의 상관으로서 함께 사건을 해결하였던 검사 이레네를 찾아간다. 동시에 영화는 에스포지토와 이레네가 만나던 시절, 그리고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여 사건을 해결하던 시절로 고스란히 돌아가 사건을 재구성한다.
영화의 한 축이 과거에 사랑하였던 에스포지토와 이레네의 재회라면 또다른 한 축은 두 사람이 함께 맡아서 해결하였던 릴리아나라는 여성의 잔혹한 강간 살인 사건을 통해 굴러간다. 고문을 통해 엉뚱한 용의자를 범인으로 몰아가는 다른 수사자와 몸싸움까지 해가며 사건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 놓은 에스포지토는 유력한 용의자를 찾아내지만 마지막 순간 그를 놓치고 만다.
그렇게 잊혀져가던 사건은 어느날 에스포지토가 아내 릴리아나를 잃은 모랄레스가 범인을 찾기 위해 기차역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나서 다시금 해결을 위한 노력이 시작된다. 그리고 사건이 발생하고 일년여가 흐른 다음 에스포지토와 이레네의 합작으로 범인인 고메즈를 찾아내고, 그에게서 범행에 대한 자백을 받아냄으로써 별다른 거부감이 없는 깔끔한 정리의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사건은 해결이 되고, 이를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이 보상을 받는구나 라고 여기게 되는 즈음, 텔레비전에 비친 이사벨 페론의 모습과 함께 또다른 난국이 시작된다. 후안 페론의 세 번째 부인인 이사벨 페론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조성된 공포 정국은 감옥에 갇혀 있는 릴리아나의 살인범인 고메즈를 풀어주는 것은 물론, 그를 정권의 하수인으로 이용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결국 고메즈를 잡아 사건을 해결하였던 에스포지토는 함께 일하는 동료의 죽음을 비롯한 위협으로 마음 속으로부터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있던 이레네를 떠나게 되고, 이레네 또한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던 이레네 또한 그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는 것으로 자신의 사랑을 접는다. 그리고 이제 이십여년이 흐른 다음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이와 함께 그때 그 시절의 사건 또한 다시금 소설을 쓰려는 에스포지토, 그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이레네 앞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자신의 아내의 죽음 이후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직장을 떠나지도 않은 채, 범인이 잡힌 뒤에도 범인이 풀려난 뒤에도 조용히 모든 것을 감내하는 것만 같았던 모랄레스가 충격적인 반전을 우리에게 던진다. 범인을 잡아내 죽이는 것이 아니라 감옥에 갇히도록 만들고 그가 남은 생을 허비하도록 만드는 것이 진정한 복수라고 여기던 모랄레스가 취한 선택에 대한 평가의 딜레마라 관객에게 던져진 것이다.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영화는 또한 사라진 시간들 혹은 시간의 기회비용에 대해 묻고 있는 것도 같다. 아내를 잃은 후 남은 평생을 그 사건 속에서 홀로 살아간 듯한 모랄레스의 시간, 도주와 검거와 해방과 사적 구속을 거치는 고메즈의 시간, 꽃 피워보기도 전에 접어야 했던 에스포지토와 이레네의 취하지 못했던 사랑의 시간이 구석구석 포진하고 있는 영화라고 해야겠다. 우리를 길들인 헐리우드 영화에 비한다면이야 지루하기 그지 없겠지만 깊은 속내를 차근차근 그러나 끈질기게 드러내고야 마는 스타일이 나쁘지 않다.
엘 시크레토 : 비밀의 눈동자 (The Secret In Their Eyes) / 후안 호세 캄파넬라 감독 / 리카도 다린, 솔레다드 빌라밀, 파블로 라고, 칼라 쿠에브도 출연 / 129분 / 2010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