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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카파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시대의 올바른 정신이 투영되어 있는 일촉즉발의 사진 한 장...

by 우주에부는바람

“... 이번에는 나도 낙하산병과 똑같은 장비를 갖췄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다른 군인들과 똑같은 군인정신으로 무장하고 싶었다.. 낙하산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곤 왼발을 문 밖으로 내민다는 것과, 이천 이천 삼천을 세야 한다는 것과, 만약 낙하산이 펴지지 않으면 비상 낙하산의 레버를 잡아당겨야 한다는 것 정도였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 어땠는지 잘은 모르겠으나 이 정도라면 정말 무대뽀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다.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너무 멀리서 찍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로버트 카파는 그 신조에 어울리게 적진 한가운데에 떨어지는 공수부대원을 따라 자기 자신도 기꺼이 낙하산을 맨다. 그것도 태어나 한 번도 낙하산을 타보지 않은 채로 말이다.


“카파의 본명은 ‘엔드레 에르노 프리드만’이다. 그는 파리 시절이었던 1936년 로버트 카파로 이름을 바꾼 이후 18년에 걸쳐 스페인내전, 중일전쟁, 2차대전, 이스라엘전쟁, 인도차이나전에 이르기까지 무려 다섯 차례의 전쟁을 취재한다. 그러나 인간 카파가 휴머니스트로, 또 행동주의자로 활동한 주무대는 바로 스페인 내전이다.”


로버트 카파는 꽤나 알려진 종군기자이다. 그가 스페인 내전 당시인 1936년 스페인에서 찍은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은 파시즘과 싸운 어느 개인의 죽음의 순간을 절묘하게 기록하면서 아직까지도 전쟁의 실상을 알리는 가장 위대한 사진 중 하나로 거론된다. 책은 이러한 카파의 2차대전 종군기라고 할 수 있다. 헝가리 국적을 가지고 있어 적국으로 분류된 로버트 카파가 어떤 여정을 거쳐 2차 세계대전의 한가운데에 도달하였고, 또 그가 무엇을 보게 되었는지가 로버트 카파 본인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다.


“... 나는 이지 레드에서 찍은 내 사진이 이번 상륙작전에서 가장 훌륭한 사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나 암실 조수가 흥분한 탓인지 네거티브를 건조시키는 중에 너무 많은 열을 가하는 바람에 유제가 녹아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내가 찍은 총 106장의 사진 중에서 건진 것은 고작 8장 정도였다. <라이프>는 열을 받아 흐려진 사진 하단에 ‘카파의 손은 몹시 떨리고 있었다’는 설명을 붙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또 한 장의 위대한 전쟁 사진을 찍게 된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유일하게 참가한 사진기자였던 로버트 카파는 해안의 상륙 작전을 수행하는 군인들과 함께 투입되고, 그곳에서 또 한 장의 사진을 힘겹게 길어 올린다. 현상 과정의 실수로 우연히도 흐릿하게 인화된 한 장의 사진... 오히려 그 흐릿한 해변 속의 떨리는 병사는 전쟁의 한 순간은 기록하는 데 아낌이 없었던 것이다.


“그 나폴리 아이들은 총과 탄환을 훔쳐서 우리가 치운지 고개에 갇혀 헤매고 있던 14일 동안 독일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다 숨을 거뒀다. 바로 그 아이들의 더러운 발이 내가 유럽에 온 것을, 내가 태어난 유럽으로 다시 돌아온 것을 진정으로 환영해준 장본인이었다. 그동안 나폴리에 진입하는 길에서 보았던, 미친 듯이 환호하던 무리의 환영 인사보다 그 아이들의 상처투성이인 발이 더 진실한 것이었다. 환호하던 무리의 대부분은 전쟁 초기에 ‘무솔리니 만세!’를 드높여 외쳤던 이들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로버트 카파는 기계적인 촬영에 임하기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바라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 사진의 표면 내부에 무엇이 도사라고 있는지 또한 짐작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야말로 로버트 카파가 세기에 남는 전쟁 사진을 남긴 진정한 이유일 것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결여된 무지의 보도 사진이 아니라 시대의 올바른 정신이 전제가 되어 있는 전쟁 사진은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훌륭한 시대 정신이 되는 것이다.



로버트 카파 / 우태정 역 /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Slightly Out Of Focus) / 필맥 / 302쪽 / 2006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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