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과거가 가리킨 방향이지만, 우리가 도달하지는 못한 그 방향에 대한
“‘음예 陰翳’ 란, 1977년에 발행된 영문판 제목에서는 ‘shadow’ 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그늘도 그림자도 아닌 거무스름한 모습’을 일컫는다. 어스름한 창호지와 촛불에 일렁이는 어두운 공간의 아름다움, 양갱과 붉은 된장국과 검은 칠기 그릇의 관계는 이 음예에서 비롯한다고 타나자끼는 말하고 있다.”
얼마전에 윤대녕의 산문을 읽다가 고른 몇 권의 책 가운데 하나이다. 탐미주의자로 잘 알려진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글이었고, 또한 탐미주의 소설가라고 일견 부를 수 있을 것 같은 윤대녕의 추천이니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중고로 구입하였다. 조금 긴 수필로 한 권의 책에 한 편만 실려 있으니 읽는 것도 어렵지 않다. 햇볕이 은근히 비치는 작은 토방에서 읽는다면 어떨까 싶은 수필이겠다.
“... 서양은 당연하고 순조로운 방향으로 와서 오늘에 도달한 것이고 우리들은 우수한 문명에 봉착하여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대신에 과거 수천 년 이래 발전해 온 진로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여러 가지 고장이나 불편이 발생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하긴 우리들이 아직 서구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오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물질적으로 진전을 이룩하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자신들의 생활에 맞는 방향만은 취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완만하긴 하지만 어느 정도 진보를 계속하여 언젠가는 오늘날의 전차나 비행기, 라디오를 대신하는 것(그것은 다른 사람의 것을 빌린 것이 아니다), 정말로 자기들에게 어울리는 문명의 이기를 발견치 못했다고 한정지을 수 없다...”
책은 욕실이나 화장실, 다실, 다다미방, 검은 칠기 등을 비롯하여 일본 고유의 전통이 깃든 건축 양식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가득 담겨져 있다. 책이 씌여진 1933년이라는 시대라면 아마도 서구의 문명이 물밀 듯이 일본으로 들어오는 시기일 터이고, 작가는 그러한 문명의 급작스러운 도달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수필 안에서는 그 대세가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나는 분위기 또한 읽을 수 있다) 반기를 들고 있다.
“... 우리들이 좋아하는 ‘아치 雅致’ 라는 것 속에는 어느 정도 불결한 동시에 비위생적인 분자가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억지를 쓴다면 서양인은 때를 송두리째 파헤쳐서 제거하려고 하는데 반하여 동양인은 그것을 소중히 보존하여 그대로 미화한다고 말하는 바이지만 숙명적으로 우리들은 인간의 때나 유연 油煙, 풍우의 더러움이 붙어 있는 것 내지는 그것을 생각나게 하는 색조나 광택을 사랑하고 그러한 건물이나 기물 내에 살고 있으면 기묘하게 마음이 온화해지고 마음이 안정된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기는 하였으되 그로 인해 놓치게 되는 많은 것들에 대한 향수가 가득하며, 그 향수를 그저 향수로만 다루지 않고 되도록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따진다. 그렇지만 그 논리라는 것에는 풍부한 감수성 또한 짙고 풍부하게 깔려 있으며, 그 아련함의 진면목에 대해서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동양의 그것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잃은 많은 것들과도 좋은 비교가 되기도 한다.
“...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항상 실제 생활에서 발달하는 것으로 부득이하게 어두운 방에 살게 된 우리의 선조는 어느덧 그늘 속에서 미를 발견하고 마침내는 미의 목적에 따르듯이 그늘을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일본 다다미방의 미는 음예의 농담 濃淡에 의하여 생겨난 것으로 그 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 서양인이 일본 다다미방을 보고 그 간소함에 놀라고 단지 회색의 면이 있을 뿐 아무런 장식도 없다고 느끼는 것은 그들로서는 당연하지만 그것은 그늘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휘황찬란한 서양의 문물, 그 문물의 도입으로 인하여 우리가 잃었지만 잃었다고 느끼지 못했던 많은 것, 오히려 그것이 우리를 옳은 방향으로 끌어당겼다고 믿도록 만든, 모든 옛것을 구식으로 만들고야 만 주입된 미적 의식에 대해 작가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우리의 식대로 발전하였을 수도 있는, 그렇지만 그 방향으로 전진해보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아련함이 가득한 수필이다.
타니자끼 준이찌로 (다니자키 준이치로) / 김지견 역, 조인숙 엮음 / 음예공간예찬 / 발언 / 125쪽 / 1996 (1933)
ps. 음예공간예찬이라는 수필은 2005년에 눌와라는 출판에서 출간된 다나자키 준이치로의 <그늘에 대하여>라는 책에 다른 몇 편의 수필들과 함께 실려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