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규 《트렁커》

어두운 과거와 함께 트렁크에 둥지를 튼 두 트렁커의 밋밋한 운명...

by 우주에부는바람

오래전에 멀쩡한 집을 버리고 나무 위에서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린 적이 있다. 물론 지금으로부터 십오륙년 전의 일이고, 그때 쓰다 만 텍스트는 어느 하드드라이브와 함께 유명을 달리 했는지 나로서는 알 수도 없다. PC통신이나 인터넷이라는 넉넉한 공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우리들의 텍스트는 휘발성 또한 강하여서 부지불식 간에 우리들을 버리고 떠나가는 탓이다.


Trumker [trʌŋker] : 멀쩡한 집 놔두고 트렁크에서 자는 사람


그렇게 잊고 나의 나무 위에 사는 사람들이, 소설을 집어들고 책 표지에 있는 저 트렁커라는 단어를 읽는 순간 불현듯 떠올랐다. 그래 도심의 가로수를 거처로 삼아 나무 아래로 내려 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트렁크에서 자는 사람이라고 왜 없겠어, 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세상은 넓고 잘 데는 많으니, 그곳이 나무든 트렁크든 제 한 몸 누일 공간으로 충분히 가능하다는 말쓰인 것이고...


“내가 세상에서 사랑하는 것이 두 개 있다. 몽슈의 사자와 베이비앤마미의 유모차다. 나는 이 두 개를 진정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적금이 깨지는 동시에 몽슈의 사자는 손에 잡히지 않는 먼 곳으로 갈기를 휘날리며 도망쳤다...”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백화점의 유모차 판매원이며 노루귀 아파트에 살지만 잠만은 그곳 근처의 공터에 세워 놓은 자신의 자동차의 트렁크에서 잔다. 그리고 비록 노루귀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새는 바람에 아래층에 보상을 하느라 돈을 날렸으나, 아직 직장은 건재하고 공터의 자동차, 그 자동차의 트렁크라는 잠자리도 쓸만하다.


“... 름에게 부러운 감정이 생겼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털어놓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두 가지를 의미했다. 하나는 그는 과거를 똑바로 기억하고 있다는 거였다. 또 다른 하나는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끄집어내서 대면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생활에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 어느 날 그 공터의 주인이라는 작자가 나타나 나의 차 옆에 주차한 자신의 차 트렁크에서 잠을 자는가 하면,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유모차 판매에서도 아주머니들과의 마찰이 잦아진다. 물론 배테랑 트렁커인 나는 또다른 트렁커인 름과 (그러니까 이 이웃사촌은 성이 이, 이름이 름, 그러니까 이름씨다) 함께 보드 게임을 하면서 조금씩 트렁커로서의 동질감을 회복해간다.


“너한테는 세 개의 자아가 있는 것 같아! 하나는 현재의 너야. 냉소적이지만 나름대로 쾌활한 자아. 네가 사람들한테 툴툴거려도 명랑하고 귀여운 사람이라고 생각해... 네가 이야기한 들피집은 네 과거일지 몰라. 물론 비틀린 기억이겠지. 비틀린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게 두 번째 자아야. 세 번째 자아는 현재의 너와 두 번째 자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해야 해...”


이렇게 현재의 나, 의 자아인 첫 번째 자아의 이야기와 동시에 소설에는 들피집에서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 두 번째 자아의 이야기가 함께 진행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의 사이, 내가 잊어버리고 있던 또 다른 자아의 이야기, 그 진실이 밝혀지며 내가 어째서 트렁커로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 또한 두서없이 끼어든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세 개의 이야기가 서로 다투며 소설의 말미를 달려가는 형국이랄까.


“름이 내 차 운전석을 열고 시동을 걸었다. 차는 천천히 전진했다가 후진하며 름의 차 쪽으로 바짝 붙여졌다. 름은 자신의 차도 조금 움직였다. 우리의 차는 트렁크를 맞대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트렁크로 들어갔고, 트렁크 문을 닫지 않았다...”


중앙장편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설은 착상은 신선하다. 그렇지만 세 개로 나뉘어짐으로써 제대로 집중하고 폭발시키지 못하는 이야기, 아직은 안착하지 못하고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문장 등이 거슬린다. 내가 유일하게 감동한 것은 위의 저 문장 부분... 그러니까 트렁크와 트렁크가 만나고 그럼으로써 트렁커와 트렁커가 만나는 저 문장에서 희안하게도 로맨틱한 감상에 젖어들고 말았다.



고은규 / 트렁커 / 뿔(웅진문학에디션) / 259쪽 / 201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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