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혼을 빼놓는 닉 혼비의 위트만점 캐릭터 구축의 사랑스러운 황홀경.
책은 '그때'와 '지금', 이렇게 두 개의 부분으로 나뉜다. 그때는 바로 지금의 나를 설명하는 전제이면서 동시에 지금의 내 찌질한 모습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니 내가 자꾸 여자들에게 차이는 것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다. 그것은 내 사적 역사의 전통 속에서 비롯된 것이며, 소설의 앞 부분인 ‘그때’는 바로 전시대를 증언하는 나의 기록으로 채워져 있다. 그렇게 소설 속 나의 사랑의 역사를 간략히 정리하자면...
앨리슨 애시워스, 1972년, 열둘 아니면 열셋이던 시절 동네 놀이터에서의 첫키스 상대이자 친구 데이비드의 여동생, 하지만 나흘째 되던 날 애리슨은 캐빈 배니스터를 껴안고 있었다. 페니 하드윅, 1973년, 훌륭한 여자였으나 절대 몸을 허락하지 않아서 날 좌절케 했고 나와 헤어진 후 곧바로 톰슨에게는 몸을 허락함으로써 날 좌절케 했다. 재키 앨런, 1975년, 친구 필의 여자 친구였으나 나와도 육체적 관계를 맺는 사이였고 결국 다시 필에게로 돌아갔다. 찰리 니콜슨, 1977~1979년, 대학 입학 이후 이년 정도 사귀었으나 나의 조바심과 위축과 맞물려 다른 사람과 눈이 맞았고 난 헤어짐 후에도 찰리를 향한 열정으로 몸부림치다가 결국 학교를 그만뒀다. 사라 켄드류, 1984년~1986년, 찰리에게 차인 나와 마찬가지로 차임에 대한 아픔을 간직한 여자였지만 결국 차임이라는 유일한 공통점 이외에는 별다른 공유점이 없었으므로 당연히 헤어졌다. 그리고 이제 로라...
“그러고 나서 난 널 만났어, 로라. 우린 함께 살았고, 지금 넌 이 집을 떠났어. 하지만 있잖아, 네가 내게 한 건 무엇 하나 새로울 게 없어. 내 리스트에 네 이름을 억지로라도 올려놓고 싶다면, 이보단 더 심하게 했어야지. 난 앨리슨이나 찰리가 날 차버렸을 때처럼 쉽사리 상처받지 않아. 넌 재키가 그랬던 것처럼 내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 놓지도 못했고, 페니 때처럼 나 자신을 혐오하게 만들지도 않았어... 그리고 사라가 떠났을 때보다 난 더욱 강해졌어. 너에게 차였을 때 우울과 자신감 상실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부글거리며 올라왔지만, 로라 넌 최고이자 최후의 연인은 아니었어. 그러니까 알겠지. 노력은 가상하다만 안됐군. 실패야. 잘 가셔.”
소설 속의 ‘그때’는 그렇게 나의 사랑의 역사에 대한 정리이면서 동시에 ‘지금’ 나를 버리고 떠난 로라를 향한 비아냥의 또다른 버전이다. 하지만 나의 여자 리스트 5위 안에도 들지 않는다고 로라에게 떵떵거리듯 말하고 있지만, 나이는 서른 다섯 즈음에 중고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며, 맘에 드는 사람에게 컴필레이션 테이프나 만들어주며, 자신의 선호 음악과 차이를 보이는 자들을 개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나, 로브는 로라와의 헤어짐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
“... 거부당하는 게 왜 그렇게 괴로운지 아는가? 컨트롤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에게 언제 차일지 컨트롤할 수만 있다면, 그것도 그리 나쁜 일로 여겨지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건 물론 차이는 게 아니지...”
게다가 집을 나간 로라가 예전 이웃이었던 레이의 집에서 기거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나서는 더더욱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중간중간 공연장에서 알게 된 미국의 포크 가수와 잠자리를 하기도 하지만 쉽게 기력이 회복되지는 않는다. 함께 일하는 딕과 배리에게 이끌려 술집이가 공연장을 가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난 오히려 집요하게 로라에게 연락을 하고, 로라의 친구에게 연락을 하면서 찌질함과 지지리궁상의 모습을 보인다.
그렇게 서서히 로라와의 헤어짐 또한 또다른 헤어짐의 리스트에 오를만하다고 여기게 되어가는 어느 날 로라의 아버지가 죽고, 난 그 장례식에 초대를 받아 참석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로라와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된다. 물론 그 새로운 관계를 이끌어가는 것은 로라이고, 이 늦된 남자 (닉 혼비는 영화 <어바웃 어 보이>의 원작자이기도 한데, 그의 소설 속 남자들은 왠지 성장을 멈춘 아이인 것만 같다. 아, 그리고 보지는 못했으나 이 소설 또한 영화회되어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라는 제목으로 국내에서도 개봉했다) 는 현명한 로라의 손에 이끌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다.
“... 난 오늘 밤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하고 기이하며, 아무래도 썩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든 생각이긴 하지만, 그 사람이 뭘 좋아하느냐보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가 훨씬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는 것을...”
대중적이며 동시에 대중음악의 향연이기도 한 소설은 닉 혼비의 혼을 빼놓는 문장으로 가득하다. 순진해 보이지만 동시에 뻔뻔스럽기 그지없고, 뻔뻔스럽지만 또 마냥 미워하기 힘든 로브라는 캐릭터는 닉 혼비의 문장이 아니었다면 완성되기 힘들었을 터이다. 여기에 로브의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배리와 딕을 비롯한 (영화에서는 배리의 역을 잭 블랙이 맡았다고 하는데, 잭 블랙을 염두에 두고 쓰지 않았나 싶게 어울릴 거라 생각된다) 등장인물들 또한 적절하게 안배되어 있다.
“나와 로라 사이에 문제가 뭔지 안다. 내가 그녀와 첫 데이트, 두 번째 데이트, 세 번째 데이트할 일이 다신 없다는 것이다. 난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이틀이나 사흘 동안 애쓸 일이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그녀를 만나려고 30분이나 일찍 술집에 가서 똑같은 잡지 기사를 뚫어지게 노려보면서 30초마다 손목시계를 확인할 일도 없을 것이며, ‘Let's Get It On’이 내 기분을 좋게 만들 듯이 그녀를 생각하는 일이 내 안의 뭔가를 소생시키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난 그녀를 사랑하고, 좋아하고, 유익한 대화를 나누고, 멋진 섹스와 강렬한 말다툼을 나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제는 조금 어른이 되었다 싶은 순간 또다시 로라의 뒷통수를 칠 것이 분명해 보이는 로브이지만, 또한 자신의 세계를 훌쩍 버리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밉지 않은 밉상 (그러니까 <시크릿 가든>의 현빈의 허름한 버전이랄까) 으로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었으면 좋겠다 싶은 로브가 스스로 뽑은 톱5곡으로 리뷰를 마무리해야겠다. 유투브에서 찾아서 들어보시라, 그러면 이 구닥다리 남자의 순진하고 찌질한 인생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을런지도...
“저기, 최종적인 톱5 갑니다. 넘버 1, 마빈 게이의 ‘Let's Get It On’, 넘버 2, 아레사 프랭클린의 ‘This Is The House That Jack Built’, 넘버 3, 척 베리의 ‘Back in the USA’, 넘버 4, 클래시의 ‘White Man In The Hammersmith Palais’, 끝으로, 그렇다고 젤 뒤떨어진다는 건 아니고, 하하, 알 그린의 ‘So Tired of Being Alone’.”
닉 혼비 / 오득주 역 / 하이 피델리티 (High Fidelity) / 미디어 2.0 (media 2.0) / 364쪽 / 2007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