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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Oct 11. 2024

윤대녕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너무 멀리서' 썼기 때문에 흡족하지 못하였던 글들에 아쉬움이...

  살다보면 누군들 ‘극적인 순간들’을 겪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극적인 순간들’이 소설가의 손아귀에 들어간다면 그 또한 얼마나 더더욱 ‘극적인 순간들’이 되고야 말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집어든 책이다. 윤대녕이라는 작가의 이름은 이제 절정을 지나 시나브로 시들어가고 있는 듯하지만, 아직까지는 그 이름의 끝을 잡고 기어이 그의 글의 정수를 파고들고 싶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옛 신화를 보면 ‘우주나무’라는 게 있다. 지상과 천상을 이어주는 나무로 아직도 시골에 가면 커다른 느티나무에 오색 천이 감겨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우리네 민간신앙으로 우주나무는 삶의 염원을 하늘에 전달해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한낱 소품에 지나지 않는, 어떤 체계적이고 일관된 주제에 의지하지 않고, 라고 좋게 말할 수도 있지만, 나쁘게 말한다면 여기저기 글품을 팔았던 것들을 다시 한 번 재탕하는 차원에서, 물론 좋게 말한다면 원 소스 멀티유스라고 칭할 수도 있겠으나, 그다지 그러고 싶지 않은, 에세이들을 얼기설기 모아 놓고 있다는 생각이다. 작가 스스로가 ‘얼마간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순수해보이던 과거의 윤대녕이라면 쉽사리 행하지 못했을 일인지도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더 이상 갈 데가 없고 받아주는 데가 없어 소설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내게 있어서 소설을 쓰는 일은 세상에 턱걸이를 하는 일이었다. 실제로 스물여덟 살에 어렵사리 등단하고 나서야 나는 간간히 세상에 속해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러니까 어쩌면 세상에 턱걸이를 한다는 심정으로 소설가가 되고 지금까지 소설을 써오고 그래서 아이도 낳고 가정도 꾸리고 살아가는 작가가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일종의 유혹이지 않을까. 어쩌면 그러한 유혹에 굴복한 자신이 부끄러워 소설의 마지막 챕터에 붙여둔 서평들 안에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을 두 편이나 넣으면서, 그 ‘끔찍한’ 이라고 표현할법한 마루야마 겐지의 글쓰기에 경외의 심정을 바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나머지 네 개 챕터에 실린 글드 중에는 오며가며 겹치기 출연하는 상황들도 많으니, 그나마 마지막 챕터인 <윤대녕의 독서일기>가 그 중 낫다.


  “... 그는 알제리, 북아프리카의 사하라, 튀니지, 이탈리아 등지의 최전선에서 종군하며 훗날 ‘카파이즘’이라 불리는 불사의 행동주의를 보여준다. 카파이즘이란 위험을 무릅쓰는 기자 정신을 일컫는 말로 ‘만약 당신의 사진이 흡족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 멀리서 찍었기 때문이다’란 카파 자신의 말이 이를 잘 설명해준다... 평생을 무국적자로, 독신으로 지냈던 그는 1954년 5월 25일, 베트남 전쟁에서 지뢰를 밟고 41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삶이라는 것에 늘, 너무 가까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윤대녕이 읽고 정리한 몇 권의 책에 관심이 쏠렸는데, 로버트 카파의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강희안의 <양화소록>,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음예공간예찬>, 송인갑의 <냄새> 등이다. 쓰기의 공력으로부터 기운이 빠져나갔다고 할지라도 그 읽기의 공력만은 나이가 들수록 정밀해질테니 믿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너무 멀리서 찍었기’ 때문에 흡족하지 않은 사진을 내치고자 치열하였던 ‘카파이즘’은 독자인 우리 뿐 아니라 작가 또한 원앙금침으로 삼아야 할 조언이 아닐까.

 

 

윤대녕 /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 푸르메 / 284쪽 / 201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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