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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맨더 필라파치 《살아 있는 시체들의 연애》

우리가 떨쳐내야 할 부질없는 욕망의 지도 혹은 욕망의 연쇄 사슬 뒤집기.

by 우주에부는바람

“린 갤러허는 뉴욕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미술 갤러리 다섯 곳 중 한 곳의 대표였고, 비교적 남들과 별다르지 않은 평범한 연애 경력의 소유자였다. 그녀가 가장 오랫동안 연애했던 기간은 일 년이었고, 가장 짧은 기간은 하룻밤이었다. 애인 없이 가장 오랫동안 지냈던 기간은 육 개월이었으며, 한 남자랑 헤어지고 새 남자를 만나기까지 걸린 최단시간은 두 시간이었다. 물론 그런 일은 딱 한 번뿐이었지만.”


앨런 모턴 → 린 갤러허 → 롤랑 뒤퐁... 애초에 이들의 스토킹 순서는 바로 이랬다. 회계사이면서 볼품 없는 몸과 내면을 가진 앨런 모턴은 뉴욕의 갤러리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갤러리를 운영하는 린 갤러허를 스토킹한다. 하지만 린은 자신의 스토커인 앨런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저 아무런 욕망을 갖지 못하는 자신에게 어찌하면 새롭게 욕망을 부여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만 집중할 따름이다. 그리고 어느 날 드디어 자신의 욕망을 다시금 불러일으키는 방법으로 (앨런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인지도) 스토킹을 하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자신의 갤러리 근처에서 발견하게 된 프랑스 출신의 검사 롤랑 뒤퐁을 스토킹 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앨런은 린을, 린은 롤랑을 스토킹하는 스토킹의 연쇄 사슬이 만들어진다.


그렇지만 이 스토킹의 연쇄 사슬에 균열이 일어난다. 자신이 스토킹하는 린, 그 린이 스토킹하는 롤랑을 향하여 앨런이 접근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 묘한 계약이 성립한다. 린이 자신이 스토킹하는 롤랑과 주말을 함께 보내는대신 앨런 또한 린과 주말을 함께 보낼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하지만 린과 롤랑이 주말을 함께 보내면서 사랑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스토킹 연쇄 사슬의 시작점인 앨런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이제 앨런은 린에 대한 스토커이기를 포기한다. 그는 스토커들의 모임에 나가서 자신을 추스르고, 각종 강좌를 찾아 들으면서 자신을 다스린다. 그리고 이제 린과 롤랑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그에게도 새로운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스토커 중독자들의 모임이 있는 시간 그 옆 방에서 진행되는 섹스 중독자들의 모임에 참가하는 제시카라는 사립탐정을 여자 친구로 두게 되었고, 심지어 아는 사람이 찍는 독립 영화에 주연으로 참여하기까지 한다.


“... 옷이나 몸무게나 근육, 머리 스타일같이 표면적인 게 달라진 게 아니야. 내면의 근본적인 변화라고. 겉으로 그게 드러나잖아. 앨런하고 같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좋아하는 것 같아. 전엔 아무도 앨런을 안 좋아했어. 하지만 이젠 앨런이 입은 옷까지 앨런을 좋아하는 것 같아...”


롤랑 뒤퐁 → 린 갤러허 → 앨런 모턴... 그리고 이제 이들의 스토킹 순서는 이렇게 바뀌었다. 린은 자신에게 욕망을 불러 일으켰다고 여겨지던 롤랑 대신 앨런을 뒤쫓는다. 하지만 앨런은 린에게 좀처럼 관심을 가질 수 없다. 대신 린의 스토킹 대상이었던 롤랑은 이제 린을 쫓는 스토커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고 이들의 이 뒤죽박죽 스토킹을 지켜보는 전직 정신과 의사이며 과잉호기심장애로 인해 이제는 자발적 노숙자 노릇을 하고 있는 레이가 있다.


“위험한 사건이 인류의 일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처음에는 좋은 일로만 생각되었을지도 몰라. 위험이 없는 삶이란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는 당장 우리 삶을 더 행복하고 기쁘게 만들어준 것이 사실이지. 하지만 지금의 인류를 만든 것은 안전하기만 한 라이프스타일이 아니었네. 따라서 인류는 안전한 라이프스타일을 영위함으로써 동시에 일종의 불행한 부작용을 겪게 된 거지. 그 부작용은 다음과 같네... 1. 활기 상실 2. 독특한 관점의 상실 3. 정신건강의 상실 4. 인류가 본래적인 라이프스타일대로 살았다면 경험할 수 있었을 풍부하고 다채로운 행복감의 상실...”


현대판 큐피드의 화살이라도 존재하는 것인지, 이렇게 순서를 바꿔가며 서로를 욕망하는 이들 세 사람의 좌충우돌 스토커들을 향하여 레이는 위와 같이 말한다. 그리고 이들 네 사람은 생명을 담보로 한 위험천만한 원시적 라이프스타일, 혹은 목숨을 건 복불복을 거쳐서 새롭게 자신들의 인연을 찾아간다. 그렇게 린과 짐, 앨런과 루스, 롤랑과 빅토리아라는 보다 완성도 높은 연인들이 탄생한다. 그렇지만...


욕망의 용광로와 같은 뉴욕의 한 복판에서 벌어지는 이 좌충우돌의 소설은 일단 끝내주게 재미있다. (소설은 한 대학의 코믹 소설 교재로 쓰이고 있다.) 평범한 현대의 도시인이 가지고 있는 혹은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얼치기 트라우마들을 은근히 비꼬는가 하면, 이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 얼마나 허위에 가득찬 것인가를 통렬하게 외친다.


무엇보다 등장인물 개개인의 캐릭터가 그렇게 맛깔날 수가 없다. (그러면 그렇지 소서은 이미 영화화가 결정되었다고 한다.) 욕망하기를 욕망하는 린, 자신의 거짓 트라우마를 아쉬워하는 앨런, 잃어버릴 것을 갖고 다녀야 안심하는 롤랑, 호기심과잉장애를 가진 정신과 의사인 레이, 노출증 환자인 맥스, 섹스중독자인 제시카를 비롯해 십여명에 달하는 인물들 모두가 절정의 연기를(?) 선보인다고 해야 할까.


부족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부족함이 되고야 마는, 그렇지만 그 부족함 없음이야말로 실제하는 유일한 부족함이 되고 마는, 도회적 라이프스타일의 서구 중산층을 향하여 이런 블랙 유머를 날리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절대적인 생활의 향상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인 박탈감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하는 오늘날, 우리들이 떨쳐내야 할 부질없는 욕망의 지도를 들여다본 기분이다.



어맨더 필라파치 / 이주연 역 / 살아있는 시체들의 연애 (Love Creeps) / 작가정신 / 395쪽 / 200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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