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상상을 허함으로써 뒤틀린 현실을 더욱 명징하게 바라보다...
*1996년 8월 19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제1회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조경란과 함께 수상한 김영하의 작품이다. 중편보다는 길고 장편보다는 짧은 분량의 감각 넘치는 소설이다. 자살 보조업이라는 일을 프리랜서로 하고 있는 주인공을 비롯해서 거의 대부분 등장 인물들이 모두 프리랜서로 일을 한다.
소설은 주인공인 나, 주인공에게 자살을 보조 받았으며 이제 주인공의 파일에 담겨 있다가 소설화되는 이야기의 주인공인 (그러니까 이 소설의 주인공은 두 명이다. 소설의 주인공과 소설 속 소설의 주인공) 유디트(클림트에 환생했다고 봐야 하는 바로 그 유대 여전사)와 닮았으며 소설 내내 아무런 언급없이 유디트라고만 불리우는 특이한 분위기의 여자라는 한 쌍의 인물군에 의해 진행된다.
여기에 비디오 작가이자 설치미술 작가이며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자신의 집에서 동생과 섹스를 나누는 유디트를 처음 발견하였으며 유디트가 자살보조업자를 만나기 위해 사라지면서 마지막으로 함께 있었던 C, C의 동생이며 유디트를 집으로 데려왔고 특히 속도를 좋아하여 수도권 일대의 도시를 누비는 총알택시기사인 K, 주인공이 유디트와의 일을 마치고 해외 여행 중에 만난 생수를 마시면 구토를 참지 못하는 에비앙, C가 전시회 준비를 위해 함께 일했으며 이미 자살 보조업자인 주인공을 만났으나 죽음에는 이르지 못했던 미미까지...
마치 펄프 픽션을 보는 것처럼 일상적인 시간의 층위를 해체시킨 채로, 그리고 등장인물의 등장 위치가 서로서로 엇갈린 채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주인공과 C의 동생인 K가 서로를 한 번도 확인하지 못할 뿐 주인공을 중심으로 불규칙한 부챗살 모양으로 소설의 사방으로 퍼져 있는 등장인물들이 복잡하긴 하지만 자살 보조업이라는 직종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온전히 잡아 끌면서 소설은 아이러니 하게도 단순하게 읽힌다.
'판타지는 황당한 것의 제시를 통해 진실의 문을 여는 서사양식이다'라는 심사평의 지적이 없더라도 현실 세계에 대한 억지 춘향식 흡착이 아니라 오히려 순진하게 현실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순수한 상상을 허함으로써 현대인의 뒤틀린 삶을 역설적으로 명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고나 할까. 이와 함께 문학평론가 도정일이 심사평에 적은, 소설 심사에 적용하는 다섯 개의 주요기준이라고 밝히고 있는 바가 의미 있어 적자면 다음과 같다. 언어의 문학예술적 상상력, 이야기 만들기의 공학적 기술 수준, 사건 구성(틀거리 짜기)의 능력, 인물 창조력, 사상과 주제의 심도. 적어 놓고 나니 조금 뻔하긴 하지만...
김영하 /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문학동네 / 175쪽 / 1996 (1996)
ps. 소설의 제목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이 한 말이기도 하다. 마르셀 푸르스트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 '사강'을 필명으로 삼은 (본명은 프랑수아즈 쿠아레) 프랑스의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1995년 마약 복용 혐의로 유죄판겨을 받은 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고 발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