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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브 《겨울 여행》

실패한 사랑을 향하여 산화하는, 조일의 세기적인 테러 메모 엿보기...

by 우주에부는바람

아멜리 노통브의 또 다른 소설이다. 데뷔 십구 년 차에 열여덟 번째 소설이라고 하니 스스로의 약속에 따라 매년 소설을 출간했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글을 쓰는 일, 아니 글이 될 만 한 소재를 생각해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작가는 이렇게 또 자신의 작품 목록에 한 권을 더 추가하였다. 작가의 작품을 (목록이 많으니 가능한 방법) 수준, 은 아니고 그 재미, 라고 하기도 뭣하지만 어쨌든 상중하로 나눠 본다면 아마도 중, 쯤에 속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겨울에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건 그리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다른 계절보다 징후가 훨씬 더 유별나고 고통스럽다... 다른 계절엔, 우선 계절 자체가 나긋나긋한 데다가, 새싹이 돋고 꽃송이가 맺히고 잎도 무성하니까 거기에 지친 영혼을 맡길 수 있다. 헐벗은 겨울에는 아무리 은신처를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다... 겨울과 사랑은 시련을 통해 욕망을 채운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 두 가지는 격려와 위로를 거부한다. 온기로 추위를 물리치면 사랑의 힘이 약해져 추잡한 이미지로 타락하고, 창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받아들여 열정을 식히면 기록적인 시간 안에 무덤으로 직해하게 된다. 내 추위의 신기루, 그 이름은 아스트로라브였다...”

사랑에 빠지는 일은 행복해 보이지만 또한 서글픈 일이기도 하다. 사랑은 스스로를 화사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초라하게 만들기도 한다. 다양한 사랑의 속성 중 몇몇은 그래서, 우리들이 겨울에 사랑에 빠지는 일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달게 받아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고통이 작아지거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름의 방식으로 흘려보낼 뿐이다.

“사랑 이야기가 성공적이라는 게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확신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사랑에는 실패가 없다는 것이다. 사랑의 실패라니, 말 자체에 모순이 있지 않은가. 사랑을 느낀다는 건 이미 승리를 쟁취한 것이기 때문에 왜 더 많은 것을 원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인 조일 (호머를 혹평한 것으로 유명하다는 그리스의 소피스트인 조일로스에서 따온) 은 사랑에 빠졌고, 그래서 고통스럽다. 그는 아스트로라브를 사랑하지만 아스토르라브는 프뇌 병이라는 (자폐증의 일종으로 휘귀한 케이스이다, 라는 설명이 되어 있지만 실제는 조내하지 않는 병) 희귀병에 걸린 비정상의 소설가 알리에노르와 함께 살며 그녀를 보살피는 일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의 결심이 선 것은 그때였다. 아스트로라브는 우주의 창조물 중에서 가장 고결한 존재였다. 그렇게 우수한 존재가 그런 식으로 행동을 한다면 세상은 내 손에 파괴되어야 마땅했다...”

이처럼 사랑의 욕망을 채우지 못하는 고통으로 안달하던 조일은 어느 날 환각 버섯을 가지고 이들의 아파트에 들른다. 그리고 환각 상태에서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마저도 실패하고, 그리고 그 실패에 대한 그녀의 조롱을 확인하고는 결심을 하게 된다. 한 여자를 사랑한 나머지 타지마할이라는 사원을 건설했던 누군가처럼,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위하여 파리의 상징적인 건물을 파괴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상 理想을 품지 않고 행동에 돌입하는 테러리스트는 없다. 이상치고는 끔찍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아무튼 간에 이상인 것임에는 분명하다... 종교에서 비롯한 것이든 조국애에서 비롯한 것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든 간에 이런 이상 理想은 단어의 형태를 취한다. 아서 쾨슬러(Arthur Koestler)의 말이 옳았다. 세상에서 살인을 가장 많이 한 범인은 바로 언어라고 했다.”

사실 소설은 비행기를 공중 납치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조일이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써내려간 메모이다. 그는 이 메모를 통하여 자신이 왜 비행기를 납치할 계획을 세웠는지, 그리고 비행기를 납치하여 어떻게 할 작정인지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계획이 성공한다면 우리는 이 메모를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소설은 그가 비행기에 올라 이륙을 기다리는 순간에 끝이 난다.

사랑은 한 순간도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비록 사랑에 실패가 있을 수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사랑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바로 그 다음 단계를 향한 또다른 욕망에 시달리게 된다. 스스로 산화하지 않고는 발현시킬 수 없는 그 거대한 욕망에 우리들 대부분은 무릎을 꿇고 만다. 그래서 소설 속 조일처럼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우는 것은 세기적인 일이다. 저기 무굴 제국 샤 자한 왕이 건설한 타지마할 사원과는 정반대의 의미에서 말이다.

아멜리 노통브 / 허지은 역 / 겨울 여행 (Le Voyage d'hiver) / 문학세계사 / 2010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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