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서 《새벽의 나나》

세계의 가장 후미진 곳에서 발현되었던, 구태의연하지 않은 시간을 담아..

by 우주에부는바람

태국에 가본 적이 없다. 그래도 태국의 그 야리야리한 유흥의 문화에 대해 모르고 있지는 않다. 트렌스 젠더들의 양산의 이유가 유독 전쟁에 시달림을 받았던 태국의 역사와 상관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얼핏 들은 적이 있다. 아시아 각지를 떠다니는 서양인들의 중간 기착지로, 그리고 값싼 비행기 편을 통하여 세계로 나아가려는 아시아인의 중간 경유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방콕을 수도로 삼고 있다는 것 정도...


물론 이 두리뭉숭하고 얇디 얇은 태국에 대한 정보는 소설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전세계인이 모여들어 매춘을 하는 이곳, 수쿰빗 소이 식스틴의 존재에 대해 나는 들은 바가 없다. 그렇지만 밤을 새워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그곳의 여성들, 그리고 그곳 여성들의 틈에서 먹고 자며 사랑(?)하였던 레오의 행적을 따라 다닌다. 레오가 그런 식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플로이가 내게도 어딘지 애달프다.


“그 시작은 약 오백 년 전 인도의 만다브 나가르 지방이었다. 레오는 고아로 자란 젊은 사냥꾼이었고 플로이는 쿨루 계곡을 향해 길쭉하게 위치한 작은 나라, 세상 사람들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왕국의 공주였다... 하루는 시장에 토끼 고기를 팔러 나온 레오와 쇼핑을 하러 나온 플로이가 마주쳤고, 서로에게 첫눈에 반했다... 결국 왕국에서 가장 토끼를 잘 잡는 사냥꾼 레오와 토끼 고기에 환장한 공주 플로이는 야음을 틈타 쿨루 쪽으로 도망쳤다...”


레오는 아프리카로 떠나기 위해 경유했던 태국의 어느 국수집에서 우연히 플로이를 만나게 된다. 동시에 레오는 자신의 잠재된 능력, 그러니까 사람들의 전생을 볼 줄 아는 능력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전생을 통하여 자신과 끈끈하게 엮여 있는 플로이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렇게 아프리카 여행을 위하여 간직하고 있던 모든 돈을 뱉을 때까지 레오는 태국에 머문다.


“... 잠자리 날개처럼 발랄하게 보이던 옷은 군데군데 실밥이 터진 싸구려 옷으로 변했다. 보도를 달가닥 소리로 채우던 원색의 경쾌한 구두에는 진흙과 오물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인공조명 아래에선 그럴싸해 보였던 화장한 얼굴도 불결한 환경과 세월과 성병과 자기 학대가 만들어낸 부스스한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렇게, 영업 시간이 넘도록 왕자를 만나지 못한 신데렐라들이 새벽의 나나 여기저기에 아프게 엎어져 있었다.”


우웨라는 독일인 남성의 소유이면서 매매춘을 하는 여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지아, 가 소이 식스틴을 떠난 후 그 후계자가 되어버린 플로이가 세 명의 다른 매춘 여성과 함께 기숙하는 그곳 아파트에서 레오 또한 생활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불편한 다리를 치료받기 위함이라는 핑계가 있었지만, 다리가 나은 이후에는 그마저의 핑계거리도 없이 그저 그들 속으로 스며들어 플로이를 지켜볼 뿐이다.


“... 공주 출신으로 왕실을 박차고 나와 비천한 사냥꾼의 아내로 살았던 플로이를 바라볼 때 레오는 따뜻하고 편안했다. 열세 살에 가출하여 수쿰빗의 거리 매춘부로 살아온 플로이를 바라볼 때 레오는 춥고 쓰라렸다...”


태국에서 한국으로 다시 한국에서 태국으로 몇 차례의 여행을 하는 동안 소쿰빗의 소이 식스틴도 변화하고, 플로이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욘, 까이, 리싸, 샨과 솜, 리나, 콴과 에릭, 빠빠 그리고 경찰관 아잇까지 총충돌한 그들 나나역 주변의 인간 군상들은 그렇게 레오에게 각인되면서 소멸한다. 그들이 피워대는 싸구려 복합 마약인 야바의 연기 속으로 짙었던 환상은 유효 날짜가 지난 통조림처럼 그렇게 데굴데굴 굴러다닌다.


“... 레오가 소이 식스틴에서 그간 줄기차게 해온 작업은, 이해가 아니라 해석이었다. 만약에 멋대로 남을 해석하는 대신 고스란히 상대에게 이입된다면, 정말로 이해한다면, 거기에는 사랑도 증오도 끼어들 틈이 없다. 상대의 즐거움과 아픔을 동시에 느끼며 상대와 동일한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그건 사람한테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방인의 눈에 비친 그곳의 삶, 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광고 카피에 없어서 다행이다. 애초에 이방인의 눈에 비친 그곳의 삶은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레오는 자신이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음에 대해 면죄부를 스스로 발급한다, 그것은 ‘사람한테는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해석의 산물이 아니라 이해의 산물이 되어야 할 터, 그러니 소설을 읽고 뭔가 미진함을 느껴야 했던 것은 작가의 탓이 아니라 소설 속 레오의 탓이라고 해야 할까.



박형서 / 새벽의 나나 / 민음사 / 406쪽 / 2010 (2010)



ps. 지금 소설책을 양손에 들고 읽는 중이라면 잠깐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 볼 일이다. 거기 소쿰빗 소이 식스틴, 나나역을 배회하는 ‘반짝반짝’ 빛나는 매춘부들의 삶이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뒤늦게 도착한 예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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