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월 《여덟 번째 방》

지금 이 순간 방을 전전하는 청춘을 통해, 그때 그 시절 방을 전전하던

by 우주에부는바람

“... 바닷가 고향집에서 서울의 친척집으로, 친척집 문간방에서 대학가 하숙방으로, 하숙방에서 단칸 셋방으로, 셋방에서 옥탑방으로, 옥탑방에서 반지하 골방, 원룸, 또 다른 방에서 방으로 옮겨 다니는 동안 나의 스무 살 시절 시곗바늘은 빠르게 돌아갔다.”


소설로 말할 것 같으면 위에서 인용한 문구로 확, 축약할 수 있겠다. 스무 살 청춘들이 집도 아닌 방을 전전하면서, 혹은 그 방에서 기숙하면서 느끼는 단상들을 서글프게, 아니 유머러스하여서 오히려 씁쓸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약간의 기술적 장치라고 하면 허름한 쪽방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영대가 자신 직전에 방을 썼던 김지영의 노트를 발견하면서, 그 노트의 이야기가 액자소설처럼 (분량으로 보나 주제로 보나 소설 속 소설이 소설 밖 소설보다 주요하지만) 다뤄지고 있다는 것 정도이다.


그런데 바로 그 부분에서부터 불현듯 옛날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나의 이십대에 대한 단상들이 우후죽순처럼 새록새록 자라난 것이다. 90년대 말 나의 여자 친구는 같은 학교 한 학년 아래의 후배였다. (그러고보니 이 후배는 소설 속 지영을 닮아 있다) 고등학교 때 지방에서 올라온 이 후배야말로 이런저런 방을 전전하다가 결국 그 어떤 방도 잡지 못한 어느 해 독서실 총무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 독서실의 수납장에서 그녀는 서너 권의 (아마도 독서실비를 내지 못해 몰래 몸만 빠져나간 자의 것이었을) 스프링 노트를 발견하였고, 어느 날 그것을 들고 왔다.


2000년대의 추레한 청춘들이 방을 전전한다면 사실 2000년 이전의 청춘들은 방이 아니라 촘촘히 나뉘어진 의자 위를 전전하였다고 해야 할까. 그 노트 속의 청춘은 제대로 알아보기도 힘든 글씨체로 넋두리를 뿜어내고 있었는데, 그것은 괴이하다 못해 괴기스러웠다. 고통스러운 한탄이 가득하며, 맞춤법이나 겨우겨우 맞추고 있었던 그 노트의 글들을 담배 한 개피 꼬나 물고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런가하면 소설 속, 그리고 소설 속의 소설 속의 주인공이 묵는 방을 읽고 있자니 두 번째 직장 동료이기도 하였던 P의 표현이 생각났다. 좁디좁은 옥탑방에서 기거하였던 P는 자신의 방을 가리켜 벤츠 하나 크기만한 방이라고 하였다. 물론 그 값이야 벤츠 한 대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그렇게 말하고 나면 조금 나아 보인다고 하였던가, 아니면 더욱 비참해 보인다고 하였던가. 그녀는 그러한 표현으로 시도 하나 썼던 것으로 기억된다.


“... 방은 단순히 개념으로서의 공간, 건축물의 일부로서의 공간이 아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의 육신과 정신이 깃드는 곳이다. 그의 일상이 알알이 스미는 자리인 것이다. 그러니 그 자체로서 방은 곧 방 주인의 삶이다. 이사를 하는 것이 힘겨운 것은 그것이 육체적으로 강도 높은 일이어서이기도 하지만 아마 그에 따라 방 주인의 삶도 바뀌리라는 예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학창 시절 떠돌았던 후배며 선배며 동기들의 방도 고스란히 떠올랐다. 창신동 후미진 골목길을 손바닥만한 창문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던 방, 주인집 마루를 대충 베니어 합판으로 막아 티비 소리도 막아주지 못하던 방, 고양이가 지나기에도 비좁아 보이는 계단을 타고 올라야 했던 대림동의 옥탑방, 축대를 타고 등산이라도 하듯 스며들었던 홍대 뒤편 석축 위의 방 등등 모래 위의 성처럼 견고해 보였으나 지금 스러지고 사라진 모든 방들이 떠올랐다.


80년대의 청춘은 90년대의 청춘으로 그리고 90년대의 청춘은 2000년대의 청춘으로 이어지고 있다. 무작정 독립을 선언하고 집을 나선 소설 속 영대도, 바닷가 서점을 떠나 높낮이가 다른 서울 하늘 아래의 방들을 섭렵한 노트 속 김지영도 영 낯설지가 않다. 치기 어린 문장들이 많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그때 그 시절의 방을 추억하기에는 적절하다. 딱 그만큼만이다.



김미월 / 여덟 번째 방 / 민음사 / 267쪽 / 201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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