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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엥겔 《책, 못 읽는 남자》

상상하기 힘든 병증 속에서도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았던 한 작가의 이야기

by 우주에부는바람

“이 책은 내가 일상생활로 되돌아오는 여정에 관한 이야기다... 내게는 그 무엇보다 나를 지금 여기까지 데려다준 모든 계단들을 되돌아보며 기억해내는 일이 중요하다. 그 길에서 내가 분투했으며 그 험한 계단을 오를 수 있도록 나를 도운 많은 이들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책은 일종의 회고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책의 주인공이자 회고록의 저자는 하워드 엥겔이라는 캐나다의 추리 소설 작가이다. 그는 베니 쿠퍼맨이라는 자신의 추리소설의 탐정을 창조하였으며 이 추리소설은 열두 권의 시리즈물로 이어졌고, 텔레비전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며, 이 소설을 통하여 각종 문학상을 받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하워드 엥겔은 어느 날 아침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된다.


“토론토의 뜨거운 한여름 아침이었다. 나는 집에 있었다. 아들 제이콥은 아직 자고 있었고 나는 느린 걸음으로 현관까지 조간신문을 집으러 갔다. 바로 그때 우연히 내게 문제가 생겼음을 알게 되었다. 2001년 7월 31일자 <글로브 앤드 메일>에 실린 사진들과 표제, 부제 같은 조판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었다. 달라진 점은 단 하나, 내가 더 이상 신문의 글자를 읽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직업을 가진 그가 감쪽같이 글을 읽지 못하게 된 것이다. 분명히 거기에 글자가 있다는 사실은 인지할 수 있는데 그것을 해석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 전날 자면서 자신에게 일어났던 뇌졸중 이후에 그는 이름하여 알렉시아 사이니 아그라피아, 실서증失書症 없는 실독증失讀症, 그러니까 쓸 수는 있으나 읽을 수는 없는 병증의 상태 속으로 빠진 것이다.


“실독증이야말로 내 고통의 핵심이었다. ‘실서증 없는’ 이란 말은 내 비위를 달래려고 만들어진 사은품과도 같았다. 마치 수술대에 올랐는데 ‘오른쪽 다리를 절단해야 하지만 신발과 양말은 간직해도 좋다’고 위로 받은 기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책 일기를 좋아하였고 작가가 된 이후에도 아침이면 신문을 읽고 한 주에 십수권의 책을 읽어냈던 그는 갑작스러운 자신의 증세 앞에서 아연실색하고 만다. 그리고 병원에 입원하여 자신에게 닥친 상황들을 인지하기 시작한다. 그는 글자를 읽지못하게 된 것 이외에도 사람들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거나 기억하더라도 이름와 매칭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기억력도 흐릿해져 있었으며, 시야의 1사분면을 보지 못하게 되었고, 지리를 포함한 공감각적 능력도 현저히 떨어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상태에 좌절하는 대신 정면으로 돌파할 생각을 한다.


“... 나의 정신은 더 이상 맑은 풀장이나 흠집 하나 없는 수정 같은 상태가 아니다. 그나마 머릿속에 온전히 남아 있는 것,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든 글을 써내야 하는 형편이었다... 지난 몇 년간 읽기 능력이 느리지만 꾸준히 향상되었다. 이는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은 덕이기도 하지만 소설가에서 독자로 ‘은퇴’했다는 나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지 않은 덕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 덕분에 그는 이러한 병증을 가진 이후에도 자신의 탐정 캐릭터를 가지고 두 권의 시리즈물을 더 생산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반인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지는 속도이지만 책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한 자신만의 연상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그의 글쓰기와 병을 이겨내기 위한 노력은 아직도 현재 진형형이라는 사실이다.


세상에는 자신이 직접 겪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우리는 그러한 경험을 보완하기 위하여 책을 읽지만, 여기에 놓인 이 작가의 병증을 이 책을 읽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눈을 찌푸리며 감탄할 수 있을 따름이다. 상상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좌절하는 대신, 특유의 낙관으로 (힘든 병마와의 싸움을 회고하는 자리에서조차 유머를 구사하는 작가라니...) 이를 극복한 투병기이기도 한 회고록은 글 쓰는 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하워드 엥겔 / 배현 역 / 책, 못 읽는 남자 (The Man Who Forgot Hot to Read) / 알마 / 214쪽 / 2009 (2007)



ps.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라는 책으로 유명한 신경학과 의사인 올리버 색스는 이 책의 추천글에서 하워드 엥겔의 병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실독증을 뜻하는 ‘alexia'는 원래 ’단어 맹증 world-blindness'을 뜻하며 신경학자들에 의해 19세기 후반부터 줄곧 관심을 끌어온 병이다. 읽기와 쓰기는 함께 가는 것으로 생각하므로 누군가가 글을 쓸 수는 있으나 그 자신이 방금 쓴 글을 전혀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은 이상하고 직관에도 어긋나기 때문이다. 지금껏 자주 관찰된 바로는 이런 ‘실서증 失書症 없는 실독증 alexia sine agraphia'이란 순전히 시각적인 문제다. 예컨대 실독증을 앓는 이들은 글자나 단어를 손으로 따라 써보면 아무 어려움 없이 그 글자를 인식할 수 있다. 음성언어 인지능력과 더불어 이런 촉각적인 읽기 능력이 멀쩡하다는 것은 엥겔씨가 실어증-일반적인 언어능력 장애-은 앓지 않고 순전히 단어 맹증에 시달림을 보여준다. 뇌졸중의 여파로 좌뇌에 위치한 시각 피질의 특정 영역이 같은 쪽의 언어 영역과 연결이 끊어진 것이다. 엥겔 씨는 눈에 아무 이상이 없으며 글자들을 완벽하게 잘 ’볼‘ 수는 있으나 그 글자들을 해석하지는 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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