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불허전이란 바로 이런 것, 보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다...
“... 나는 박물관에 있는 물건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자세하게 설명해 줄 카탈로그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퓌순을 향한 나의 사랑과 그녀에 대한 사모가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의 이름으로 내 이야기를 서술해 나갈(물론 나의 동의하에) 오르한 파묵 씨에게 연락했다... 나는 제대로 준비를 하고 오르한 씨를 만나러 갔다. 퓌순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먼저 그에게 지난 십오 년 동안 전 세계의 박물관 1743곳을 방문하고 입장권들을 모두 모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가 좋아하는 작가들에 관한 박물관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는 죽을 때가지 정확히 5723군데의 박물관을 돌아다녔습니다.)”
이 두 권짜리 소설은 박물관을 만든 장본인이자 이 거대한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인 케말 바시마즈의 의뢰를 받은 오르한 파묵이 (소설 속에서 소설 의뢰를 받은 인물의 실명이 바로 오르한 파묵) 작성한 ‘순수 박물관’의 카탈로그 역할을 하는 글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만 오르한 파묵은 이 의뢰를 받고 케말과 만나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이 글을 일인칭으로 작성할 생각을 하였고, 그 때문에 소설의 대부분은 케말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사실 그 누구도, 경험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는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특히 젊은 시절에는 그 누구도 상황이 나빠질 거라고 생각하며 살아가지 않을 분더러, 만약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살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행복하다면, 미래도 아름다울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낙관적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짧고도 강렬했던 케말과 퓌순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며, 바로 그 사랑의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되는 길고도 지난한 사랑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벨과 결혼을 앞두고 있던 케말은 퓌순과의 만남 이후 퓌순에게 빠지고 만다. 그렇지만 케말은 시벨과 약혼식을 치르고, 퓌순은 어느 순간 케말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드디어 케말의 길고 긴 사랑 혹은 그 사랑의 고통이 시작된다.
“정확히 칠 년하고도 열 달간, 퓌순을 만나러 저녁 식사 시간에 추크루주마로 갔다. 처음 간 것은... 1976년 10월 23일 토요일이고, 퓌순과 나와 네시베 고모가 추크르주마에서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한 것이 1984년 8월 26일 일요일이니, 그 상에 2864일이라는 날이 지나간 것이다. 이제 이야기할 이 409주 동안, 나의 메모에 의하면 그 집에 1593번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사라진 퓌순을 찾아 동분서주하던 케말은 몇 달간의 시간이 흐른 뒤, 드디어 퓌순이 자신의 가족과 함께 이사한 곳을 알아낸다. 그 사이 케말은 시벨과의 결혼까지 포기했다. 하지만 케말은 퓌순의 집을 방문한 그 자리에서 퓌순의 남편 페리둔을 소개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퓌순을 향한 케말의 사랑은 포기되지 않는다. 그는 끊임없이 퓌순의 집을 방문하였으며, 점점 퓌순을 사랑하게 되었고, 급기야 퓌순과 연관된 모든 물건을 사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케스킨 씨네 집 식탁에 앉아 있던 팔 년 동안, 나는 퓌순이 피운 4213개의 담배꽁초를 가져와서 모았다. 한쪽 끝이 퓌순의 장미꽃 같은 입술에 닿고, 입속으로 들어가고, 입술에 닿아 젖고(가끔 필터를 만져 보았다) 입술에 바른 립스틱 때문에 붉은색으로 멋지게 물들어 있는 이 담배꽁초 하나하나는, 깊은 슬픔과 행복한 순간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아주 특별하고 은밀한 물건들이다...”
그리고 퓌순과의 열정적인 사랑을 하고 구년여가 흐른 즈음, 그러니까 퓌순의 집을 방문한지 팔년여가 흐른 즈음 드디어 퓌순은 남편인 페리둔과 이혼한다. 그리고 케말과의 결혼을 허락한다. 그렇게 결혼식을 앞두고 파리로 여행을 떠난 케말과 퓌순은 구년여의 시간을 뛰어 넘어, 구년 전의 기억을 한 켠에 둔 채 육체적 관계를 나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시간은 다음 날 아침, 한 순간에 일단락 된다.
마치 파트리스 르콩트의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에서 마틸드가 그러하였듯, 소설 속의 퓌순은 드디어 완성이 된 듯한 두 사람의 육체적 관계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케말의 곁을 훌쩍 떠나버린다. 그야말로 로망 가득한 소설을 길고 길게 읽으면서, 소설 속 케말이 되어서 안타깝게 두 사람의 결합을 갈망하였던 독자인 나는 그 충격 속에서 한동안 빠져나올 수 없다.
“우리 소설의 주인공이자 박물관 설립자인 케말 바스마즈는 2007년 4월 12일, 그러니까 퓌순의 쉰 번째 생일에, 그 자신은 예순두 살이었을 때, 밀라노에서 항상 머물던 그랜드 호텔 데 밀라노의 비아 만초니가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호텔 방에서, 아침 무렵 발생한 심장마비로 잠든 채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퓌순이 없는 자리를 퓌순과 관련된 물건들로 채운, 퓌순을 보려는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팔년여의 시간동안 찾아갔던 퓌순의 집은 ‘순수 박물관’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 포스트 모던한 작가 오르한 파묵은 실제로 터키의 그곳에서 ‘순수 박물관’을 개장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오르한 파묵스러운 소설이다. ‘바늘로 우물 파기’라고 칭해지는 그의 소설 작법이 그대로 드러난 소설이다. 더 이상 그럴 수 없다 싶게 집요한 소설 속의 케말은 오르한 파묵의 집요한 글쓰기를 통하여 생동한다. 명불허전이니,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오르한 파묵 / 이난아 역 / 순수 박물관 (Masumiyet Muzesi) / 민음사 / 1권 435쪽, 2권 418쪽 / 2010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