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무심한 듯 툭, 묘하게 김영하스러운 13개의 글들...
잡다한 글들이 뒤죽박죽 섞여있지만 묘하게도 김영하스럽다고 해야 할까. 단편소설집이지만 군데군데 꽁트라고 불러야 할만한 엽편의 글들이 끼어 있다. 딱히 어떤 맥락이 있거나 일관된 메시지가 있는 것도 아닌, 주제 의식이랄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글들이, 그냥 툭 (갑자기 <방자전>의 마노인의 대사가 떠오르네, 그냥 무심한 듯 툭) 독자들 앞에 던져진 것 같다.
「로봇」.
‘제1조, 인간을 헤쳐서는 안 된다.’, ‘제2조,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단 1조에 어긋나는 경우는 제외한다.’, ‘제3조, 위 두 원칙을 위배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라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을 첫 만남에서 이야기하는 엉뚱한 남자 이문상과 그런 남자와의 하룻밤 이후 홀로 남겨진 수경의 이야기... 나쁜 남자의 수법을 로봇 3원칙에 대입시켰다고나 할까. 여하튼, “저는 이문상이라고 합니다... 남자가 먼저 자기 이름을 밝혔다. 수경은 테이블 위에 자기 이름의 자모들이 흩뿌려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숙인 채 주저하며 한 자 한 자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와 같은 김영하 논리적이면서도 아슴프레한 문장 혹은 그러한 글들의 매력은 여전하다.
「여행」.
“... 여자는 발목까지 물이 찬 도로를 건너던 와중에 갑자기 뿅 하고 사라져버렸어. 남자가 달려나가보니 여자는 종적이 없고 여행가방만 물에 둥둥 떠 있었지... 뚜껑이 없는 맨홀에 빠진 거야. 아바나의 말레콘 해변에는 그런 맨홀들이 종종 있대. 그리고 맨홀들은 바로 바다로 통해 있지. 여자는 시체조차 찾지 못했어. 바다로 그대로 빨려들어간 거지. 여행가방만 덜렁 남기고.” 수진의 미국행 이후 사실상 관계가 끝났다고 여기던 한선은 그러나, 그녀 수진이 자신의 결혼 소식을 알린 이후 굳이 마지막 여행을 제안한다. 이 앞뒤 맥락이 없는 스토킹 공포 소설에 김영하는, 위와 같은 쿠바 이야기 하나를 살포시 얹어 놓음으로써 때깔을 확 바꿔 놓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악어」.
“... 신이 리모컨을 집어들고 나라는 인간의 볼륨을 확 꺼버린 걸까? 이제 지겨워졌다고, 시끄럽다고, 채널을 돌려버린 걸까?” 어느 날 갑자기 천상의 목소리를 갖게 되었던 남자가 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갑작스럽게 받았던 것처럼 콘서트를 앞둔 어느 날 갑자기 목소리를 잃고 만다. 그리고 그 남자조차 증발을 하고 난 며칠 후, 그가 살던 아파트 잔디밭에는 악어 한 마리가 죽어 있다.
「밀회」.
해마다 도서 관련 박람회가 열리는 독일의 어느 도시, 그렇게 그곳에서 칠 년째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한 남자와 여자의 밀회 이야기... 그리고 카푸그라증후군 (친밀감에 대한 정보를 담당하는 우뇌의 부분에 마비가 생겨, 자신이 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인식하는데 혼란을 느끼는 증후군) 을 앓고 있는 그녀의 남편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나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이야기...
「명예살인」.
화사하고 투명한 피부를 가지고 있던 피부과 병원 접수 담당 직원의 피부가 어느 날 트러블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제 그 피부과의 시술로도 치유되지 않는 피부를 가지게 된 그녀는 어느 날 미안하다는 유서와 함께 자살한다... 그래서?
「마코토」.
“... 도둑키스와 어설픈 포옹은 생각보다 오래도록 지속되었고 나는 거기가 어디인지, 내가 누구와 키스를 하고 있는지조차 까맣게 잊어버렸다. 아득해지는 감각 속에서 내 영혼이 마치 잘 맞은 야구공처럼 펜스 너머 저 광대한 우주로, 하나의 작은 점이 되어 사라져가는 것이 보였다.” 교환학생으로 나의 곁에 찾아왔던 일본인 유학생 마코토... 그런 마코토를 사이에 두고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렀던 현주, 그리고 그 현주의 죽음... 세월은 흐르고 일본에서 다시 마주친 마코토...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그곳에서의 마지막 한 판...
「아이스크림」.
‘신용대출, 신용 없어도 대출’ 신용이 없어도 신용대출이 가능하다는 어처구니없는 모순의 광고 카피가 횡행하던 IMF 시절, 어느 부부의 아이스크림 이야기... 자신들이 자주 먹는 아이스크림에서 맡았던 기름 냄새와 회사에 대한 항의, 그리고 그들 부부에게 찾아온 제과회사 소비자상담실의 김부장... 별 이야기가 아닌데도 읽다보면 짠하다, 이또한 김영하의 특기!!
「조」.
“조는 후회하지도, 반성하지도 않는다. 대신 오래 전 영화관에서 마주친 구절을 조용히 읊조린다. ‘이것은 타락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자 구치소가 어두운 극장처럼 느껴졌다...” 백화점에서 서성이며 좀도둑의 등을 치는 형사 조, 그러한 조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아름다운 정’과 ‘바람난 여교수의 딸’과 ‘구두매장의 김’과 ‘클리니크의 김’에 대한 시니컬하고 황량하고 무미건조한, 그러니까 CCTV처럼, 그런 이야기...
「바다 이야기1」.
“... 아내가 어디 다녀왔느냐고 물었다. 모래에 파묻힌 사람과 이야기를 좀 나누고 왔다고 하니, 믿지 않았다. 침대에 누웠지만 아무래도 잠이 오지 않아 다시 해변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구덩이만 덩그러니 남아 있고 아무도 없었다. 호텔로 돌아오자 아내가 이제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며 엎드려 울고 있었다.” 두 페이지 짜리 엽편 소설인데, 읽고 나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은근히 이상해진다.
「바다 이야기2」.
해변에서 우연히 엑스트라를 하며 걸어 다녔던 나의 이야기, 인데 싱겁다...
「퀴즈쇼」.
어린시절 함께 자랐던 여자 아이, 식구들이 모두 살해되고 혼자 살아남았던 아이, 적지 않은 재산을 상속받았던 아이 은이를 이십대가 되어서 퀴즈쇼에서 만난다. 그리고 여차저차 하여 궁궐 같은 은이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살짜쿵 반전...
「오늘의 커피」.
‘오늘의 커피’는 언젠가 ‘카페라테’의 코뼈를 부러뜨린 적이 있다. 그리고 우연히 광화문 스타벅스에서 두 사람이 다시 만난다. 그리고 이제 ‘카페라테’는 ‘오늘의 커피’의 코를 한 대 때리기로 한다.
「약속」.
버스 터미널에서 한번쯤 겪었을 차비 없는 그녀의 말짱한 구걸 행각... 친구를 만나러 내려왔다가 지갑을 잃어버린 그녀의 차비를 빌려달라는 말씀과 꼭 갚겠다는 약속...
김영하 /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 문학동네 / 271쪽 / 2010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