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맥스로부터 시작하여 아름다움의 근원을 재치있게 전진...
1591년 2월 28일 아침... 다도의 명인인 센 리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대신 할복을 결심한다. 그리고 자신의 결심을 아내인 소온에게 전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다도를 행하는 장소를 청소하고 녹유 향합과 함께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어느 여인의 손톱을 숯불에 얹는다. 그리고 그의 할복 집행을 만류하기 위해 그러나 만류할 수 없어 그 증인이 되어야만 한 세 명의 인물이 그의 다실에 들어선다.
실존 인물이며 다성(茶聖)이라 불리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아 모두의 부러움을 샀던 센 리큐는 도대체 어떠한 이유로 갑자기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자결을 해야 했을까. 역사소설을 특기로 삼고 있는 작가는 바로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하여 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제 이 미스터리한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바로 센 리큐, 그에게 묻기로 한다.
그리고 소설은 센 리큐가 할복을 하려고 작정한 바로 그 날을 기점으로 조금씩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할복 전날, 할복 15일 전, 할복 16일 전, 할복 24일 전, 할복 한 달 전을 거쳐 할복 전해, 그리고 훗날의 리큐인 요시로가 19세가 되던 오십여년 전으로 올라가 드디어 그가 최초로 목격한 살아 있는 아름다움으로,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죽음의 순간까지 홀로 새겨야 했던 경위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름다움은 결코 얼버무릴 수 없습니다. 도구든, 행다든, 다인은 항상 목숨을 걸고 절묘한 경지를 추구합니다. 찻숟가락에 박힌 마디의 위치가 한 치라도 어긋나면 성에 차지 않고, 행다중에 놓인 뚜껑 받침의 위치가 다다미 눈 하나만큼이라도 어긋나면 내심 몸부림을 칩니다. 그것이야말로 다도의 바닥없는 바닥, 아름다움의 개미지옥. 한번 붙들리면 수명마저 줄어듭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소설도 그다지 즐겨 읽지 않으니, 오래 전에 사놓은 이 책에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우리 민족에게는 불쾌하기 그지없는 이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꾸 나오는 사실도 책을 집어 드는데 망설이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일본의 대중적인 문학상인 나오키상을 수상했다는 (텐도 아라타의 <애도하는 사람>과 끝까지 경합을 벌이다 결국 공동 수상을 한) 소설은 일단 집어들고나면 끝가지 읽지 않을 수 없다.
파격적인 스토리의 진행 방식 (할복이라는 클라이맥스를 맨 앞에 두고 오히려 뒤로 돌아가는), 무수한 등장 인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개개인 캐릭터의 소홀함 없는 창조, 꼼꼼하기가 다도 실행에 버금가는 다도에 대한 설명까지 별다른 빈틈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일본의 역사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사실과 허구를 절묘하게 이어붙임으로써 소설의 마지막까지 단단하게 긴장감을 붙들어매고 있다.
“삼독은 불법이 설파하는 해독으로, 탐욕, 진에, 우치, 즉 욕심, 노여움, 어리석음을 말한다... 잘 생각하면 세상의 온갖 화와 유위전변, 인간의 성쇠는 거의 이 세 가지 독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사람이 길을 잘못 드는 것은 대개 이 삼독이 원인이었다...”
일본을 통일하였다는 업적에 휘둘리지 않고 센 리큐의 대척점에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냉정하기 그지없다. 물론 이와 함께 작가는 센 리큐 또한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이라는 맹목에 휘둘렸음을 간간히 드러냄으로써 우리들 보편적 삶이 가지는 어떤 무상함을 잊지 않는다. 여기에 열 아홉 센 요시로에서 일흔이 넘은 센 리큐에게까지 이어진 이름 없는 조선 여인에 대한 사랑의 이야기는 극도로 절절제된 다실 안 붉은 꽃 한 송이의 화룡정점처럼 소설을 풍성하게 만든다.
“맛이 났던가, 나지 않았던가. 끝까지 다 마시자 기이한 산뜻함만이 남았다. 겨울 하늘이 서글프리만큼 푸르렀다... 이윽고 입안에 쓴맛이 퍼졌다... 사람이 산다는 것의 엄청난 무게를 억지로 삼킨 기분이었다.”
‘이利를 쉬게 하라’, ‘날카로운 것도 적당히 해두라’는 의미로 천황으로부터 하사받았다는 리큐(利休)라는 이름... 하지만 죽음의 순간까지도 아름다움을 향한 감성을 포기하지 않았던 센 리큐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시퍼렇게 날이 선 개성은 찻잔 속의 태풍처럼 요란하다. 또한 예술을 대하는 그들 일본인의 단면이 오백여년 전 일본의 역사 속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니, 향이 깊은 일본의 전통차라도 한 잔 마신 느낌이다.
야마모토 겐이치 / 권영주 역 / 리큐에게 물어라 (利休にたずねよ) / 문학동네 / 488쪽 / 2010 (2009)
ps. 다도 : ‘차노유茶の湯’라고도 한다. 다실을 꾸미고 다구를 준비하여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즐기는 과정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찻잔인 다완을 비롯하여 족자, 꽃병, 차솥, 물통, 찻통, 찻수저, 차선 등 수많은 도구가 쓰인다. 다회의 핵심이 되는 것은 주인의 차를 대접하는 솜씨, 사용된 도구의 아름다움과 조화, 그리고 대접받는 손님의 마음가짐과 예절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