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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바람의 그림자》

가혹한 운명, 그 촘촘한 사랑의 연대기는 언제까지고 진행중...

by 우주에부는바람

출간된 순서대로 하자면 <바람의 그림자>를 먼저 읽었어야 했다. <바람의 그림자>가 2001년, 그리고 <천사의 게임>이 2008년에 출간되었으며, 두 책 모두에는 다니엘 집안이 운영하는 서점 그리고 그 서점의 주인이 가지는 특혜 중 하나인 ‘잊혀진 책들의 묘지’라는 거대하고 미스테리한, 알려지지 않은 도서관이 자리잡고 있다. 소설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책 혹은 서점에 대해 가지는 작가의 착찹한 애정이 깃들어 있는 지점이다.


“... 서점은 우리가 호사스럽지 않게 먹고살 만큼은 돈벌이가 된다. 그리고 나는 다른 일을 하는 나를 상상할 수가 없다. 매상은 해가 갈수록 줄어든다. 나는 낙관론자라서 오른 것은 내려가고 내려간 것은 언젠가는 오를 거라고 내 스스로를 위안한다. 독서라는 예술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고, 그것은 내밀한 의식이라고, 책은 거울이라고, 우리들은 책 속에서 이미 우리 안에 지니고 있는 것만을 발견할 뿐이라고, 우리는 정신과 영혼을 걸고 독서를 한다고, 위대한 독서가들은 날마다 더 희귀해져가고 있다고 베아는 말한다...”


그렇다고해서 두 장편 소설의 내용이 고스란히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두 소설 모두 흐릿한 안개 속의 도시에서 벌어지는 일들이고, 두 소설 모두에서 불에 탄 사람 혹은 장소가 등장하고, 불구덩이 속에서도 재로 변하지 않는 우여곡절 가득한 사랑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두 소설은 작가가 가지는 드라마틱한 이야기 만들기의 아낌없는 세례를 받고 있음을 숨길 수 없다.


“저주받은 책들의 이야기, 그걸 쓴 사람의 이야기, 소설을 불태우기 위해서 소설 바깥으로 나온 인물의 이야기, 그리고 배신과 실종된 우정의 이야기야. 사랑의 이야기이고 증오의 이야기이며 바람의 그림자에 살고 있는 꿈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


소설은 서점 운영자의 아들인 다니엘 셈페레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찾아간 ‘잊혀진 책들의 묘지’에서 <바람의 그림자>라는 소설을 자신의 운명의 책으로 선택함으로써 시작이 된다. 다니엘 셈페레가 그 책을 ‘잊혀진 책들의 묘지’에서 집어드는 순간, 바르셀로나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작품을 출간한 이 작가는 운명적으로 소년과 연결되고 그때부터 십수년에 걸친 <바람의 그림자>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 책에 깃든 비밀을 알아보고자 시작된 첫 순례지에서 다니엘 셈페레, 내가 만나게 되는 도시 최대의 서적 보유자인 구스타보 바르셀로의 조카인 클라라 바르셀로, 그리고 ‘잊혀진 책들의 묘지’의 관리자인 이삭 몽포르트의 딸인 누리아 몽포르트에서 나의 유일한 친구인 토마스 아길라르와 그의 누이인 베아트리스 아길라르로 이어지는 인물들이 사랑의 목록에 이름을 올릴만한 계보이다.


그런가하면 <바람의 그림자>의 저자인 훌리안 카릭스 혹은 <바람의 그림자>를 비롯한 훌리안 카릭스의 책을 없애고 다니는 유령의 인물 라인 쿠베르, 거리의 노숙자에서 나의 훌륭한 조언자로 변신하는 페르민, 그리고 훌리안 카릭스와 한 학교에 다녔던 호르헤 알다야, 하비에르 푸메로, 미켈 몰리네르를 비롯해서 훌리안 카릭스의 부모인 소피 카락스 포르투니와 안토니 포르투니 그리고 훌리안 카릭스의 후견인이었던 호르헤 알다야의 아버지인 돈 리카르도 알다야를 거쳐 이들의 오누이이자 딸인 페넬로페 알다야로 이어지는 계보는 이 책의 미스터리를 이어가는 든든한 인물군이다.


“... 그 수년 동안에 하신타는 세월을 이기지 못해 젊음을 잃고 같은 이름과 같은 얼굴을 간직하고 있는 다른 여인으로 변했다...” “입 안이 적대적인 말로 불타올랐지만 나는 혀를 씹었다. 독약 같은 맛이 났다.”


물론 책은 스토리만 탄탄한 것이 아니다. 굵직하게 자신의 스토리를 이어가기 위하여 작가는 끊임없이 변모하는 인물들을 따라다니며 묘사하고, 독자들의 미각을 되살릴만한 양념 같은 문장들을 구사한다. 스토리에 문장이 매몰되지도 않고, 문장에 집중하느라 스토리를 놓치는 일도 없는 적정한 수준을 유지하는 것도 작가의 좋은 천성이다. 그렇게 우리는 다니엘 셈페레를 따라서 사건으로 들어가고 거기에서 <바람의 그림자>의 저자인 훌리안 카릭스를 만나게 된다.


“언어보다 더 지독한 감옥이 있다.”


하나의 가혹한 운명이 놓친 사랑, 그 사랑의 연대에 촘촘하게 박혀 있는 사건과 사고들을 따라 움직인 소년,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하여 밝혀진 진실을 통하여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게 되는 청년... ‘언어보다 지독한 감옥’에 갇힐 위험에 처한 모든 독자들을 대변하는 이 청년 다니엘 셈페레의 수기는 그렇게 우리들 모두를 향하여 그러니 조심하라고 외치는 것이다.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 정동섭 역 / 바람의 그림자 (La sombra del viento) / 문학과지성사 / 전2권 각권 392쪽, 396쪽 / 2009, 2005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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