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상 《낙타》

옆구리에 생기는 절벽, 그 생생하게 사막같은 아픔...

by 우주에부는바람

“규가 학교와 학원에서 대학입시에 생을 걸고 있을 때, 몽골의 아이들은 말고삐를 자고 초원과 황무지와 사막과 그리고 짐승들을 배웠다. 규가 손전화와 MP3 그리고 컴퓨터를 갖고 놀고 있을 때, 몽골의 아이들은 말을 타고 낙타를 몰며 놀았다. 규가 게임 모니터와 텔레비전에 빠져 있을 때, 몽골의 아이들은 초원의 지평선과 사막의 모래폭풍을 보았다.”


별다른 징후도 알아차리지 못하였는데 어느 날 나의 아들 규는 단테의 신곡을 따라 여행을 간다는, 생을 리셋하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생을 거둬버렸다. 아들과 함께 고비사막을 건너 흉노족이 남긴 암각화를 보러 가자는 약속은 이제 지킬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나는 기어이 떠난 사막으로의 길에서 아들 규를 불러낸다. 그리고 규와 함께 유목의 본질인 사막을 여행하고, 그 여행 중에 사람들을 만나고, 결국 그림을 보는 순간까지 아들과 동행을 한다.


‘... 유목의 핵심은 자유인데, 진정한 자유란 고독을 견디는 정신의 힘에서 비롯돼. 외롭다고 징징거리는 사람은 결코 자유인이 될 수 없지. 그 사람은 외로운 사람이 아니야. 심심하기 싫다는 엄살쟁이인 것이지.’


작가는 실제로 몇 년전 아들을 잃었다. 소설과 마찬가지로 아들의 죽음 이후에야 아들의 미니홈피에 남겨진 유서와 다름없는 글을 읽었다. 모든 부모가 그러하듯 작가는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죽음만큼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징징대는 대신에 그 아들을 자신의 옆구리에 새기기로, 바위에 새겨진 흉노족의 그림처럼 자신의 몸에 받아들이기로 작정을 했다고 여겨진다.


“나는 내가 슬펐다... 슬픔에는 윤리도 논리도 들어 있지 않았다. 상처는 상투성에서 비롯되었다. 생활과 작품과 상상력의 상투성에 사로잡혀 옆구리의 절벽만 자꾸 높였다...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서 무엇이 두려워 머뭇거렸던 것일까. 게다가 엄살은 또 얼마나 심했던가. 나는 내가 불편했다.”


소설 속의 내용은 여러모로 불편하다. 작가에게 벌어진 실제하는 사건을 알고 있다는 것이 때때로 소설을 읽는 시선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것만 같다. 소설 속의 내가 아무리 슬픔을 담대하게 받아 들이더라도 소설 밖 작가에게 벌어진 일이 자꾸만 감정의 꼬투리를 잡고 늘어진다. 사막을 건너면서 마주치는 사람들, 사연들, 동물들 하나하나에 그 그림자가 이입되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바람은 사막의 심장이었고 영혼이었다. 쉬지 않고 모래를 이동시켜 새로운 사구를 만들었고 또 지워버렸다. 사막은 파도처럼 출렁이며 모래 위에 바람의 결을 새겼다... 지상의 사막은 여기에 있고, 내 마음의 사막은 내 안에 있었다...”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사막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 한 귀퉁이에 몇 천 년을 버틴 그림이 있다. 아들을 잃고 옆구리에 절벽을 만든 작가는 그 사막을 다시 한 번 가로지르며 자신의 상처를 슬그머니 내려 놓는다. 그 무게가 얼마만한 것인지 우리가 쉽사리 판별할 수는 없을 터... 그래도 출렁이는 감정으로 변화무쌍한 사막의 모래쯤은 확인할 수 있다.



정도상 / 낙타 / 문학동네 / 247쪽 / 201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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