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잣거리의 이야기들이 모두 산해진미인 것은 아니니...
장편 소설 분량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할 수 있다면 아마 대하소설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뭇잎 한 장 크기의 엽편 소설들이나 손바닥 크기의 장편 소설(掌篇小說)들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에서는 단편 소설이나 중편 소설이나 장편 소설이 나올 터이고... 그렇게 소설가들은 자신의 주변에 있는 작은 이야기들로부터 불씨를 살려서 소설이라는 화덕을 달구어내는 것이다.
“직업상 어디에 이야깃거리가 있다면 도산검림을 불사하고서라도 취재를 감행해야 하는 바, 때로는 독지가들이 조물주의 심부름이라도 하듯 다 만들어진 이야깃거리를 입으로 집어넣어 주는 경우가 있다...”
성석제의 엽편 소설집이라고 할 수 있는 책에는 그렇게 작은 불씨와도 같은 마흔 아홉 개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작가 자신의 이야기인 것도 있겠으나 거개가 지인들이나 지인들을 통하여 들은 이야기일법한 그것들에서는 미미하나마 진동이 느껴진다. 이 이야기들이 땅을 열어 소설로 변하는 것이로구나 생각하며 읽으면 그 진동을 더욱 강하게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살면서 만나게 되는 소설의 작은 기미, 짧은 이야기 앞에서 나는 특별히 더 긴장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고압선에서 튀는 불꽃 같은, 서늘한 한 줄기 바람처럼 흘러가고 벼락치듯 다가오는 우연과 찰나의 연쇄가 나를 흥분시킨다. 이야기라는 인간세의 보석에 나는 언제나 홀려 있을 것이다. 소설 쓰는 인간이다, 나는.” - 작가후기
하지만 역시 소설가는 소설로 독자와 대면하는 것이 옳다. 이 작은 불씨들을 독자인 우리와 공유하겠다는 큰 마음씀씀이는 고마울 수도 있지만, 숨기고 보여주지 않아도 되니 그것을 어엿한 큰 불로 만들어내는 일에 더욱 열정을 쏟는 것이 작가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그저 허망하게 흩날리는 잡불을 들여다보는 일은 그렇게 날리다 스러지는 불티만큼이나 헛헛하다.
“한 다리 건너 아는 삶이 출판사를 차렸다. 그는 원래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출판이라는 문화사업에 사명감을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출판사의 첫 번째 책으로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을 내기로 하고 내게까지 의견을 구해왔다. 내가 그런 걸 알면 대답이나 해주고 있었겠는가. 진작에 그런 이야기를 담은 책을 써내고는 카리브해의 요트 위에서 시가를 물고 다이키리를 마시고 있었을 것이다...”
그나마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책>이라는 꼭지에서는 조금 웃을 수 있었다. 그것은 성석제가 말한 위의 출판사에서 나왔다는 그 책을 나 또한 알고 있기 때문인데, 미국에서는 이십여년이 넘게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차지고 있다는 그 책의 내용인즉슨 여자들을 한 명이라도 더 꼬시고, 그렇게 여자들을 꼬시면서도 애인이나 아내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는 비법을 소개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이 출판사는 이러한 책의 컨셉을 표지에도 그대로 적용시켰는데 (사실은 미국의 출판사도 같은 형식이었지만), 겉표지에는 책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프린트하고 그 속표지에 진짜 이 책의 내용과 연관이 있는 프린트를 함으로써, 이 책을 자신의 집 안방 서가에 꽂아 놓는다고 하여도 절대로 아내에게 들키지 않도록 하는 치밀함을 보인다. 이러한 책의 내용과 그 껍데기에 드러난 얄팍한 테크닉을 보고서 한참을 웃은 기억이 있는데, 이 책을 성석제 또한 소장하고 있다고 하니 웃음이 저절로...
하지만 소설로 (독자들과) 맞장뜨지 못하고 저잣거리에 굴러다니는 이야기들로 허겁지겁 시장기나 때우고 있는 작가를 본 것 같아 조금 씁쓸하다. 살인적으로 웃기는 성석제의 이야기를 잘 차려진 밥상과 같은 소설을 통하여 보고 싶다.
성석제 / 인간적이다 / 하늘연못 / 253쪽 /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