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으로 들어온 그녀, 눈물처럼 창조하고 사라져가다...
아내는 지하철에서 다섯 개들이 칫솔을 구매하듯 그렇게 제목에 반하여 책을 충동구매 하였다고 한다. 어린이날, 동생의 10개월된 딸아이와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동쪽에서 서쪽 끝으로 지하철을 타고 가는 길에 아내가 충동구매한 책을 동반자 삼았다. 자리를 잡고 앉아 몇 페이지 들추다가 털썩 닫았다. “왜 그래?” 아내가 묻는다. “이거 아무래도 무시무시한 책인 것 같아.” “뭐가?” “음... 그게 얼핏 봤는데, 내러티브가 없어.” “그래? 읽기 힘들 것 같으면, 내가 읽는 거랑 바꿔 봐도 돼.” “아니, 뭐, 그럴 것까지야...” 결국 오며가며 모두 읽기는 했지만, 피곤한 동생네의 방문만큼이나 혼곤한 책읽기가 되고 말았다.
“그 여자가 책 속으로 들어왔다. 그 여자는 떠돌이가 빈집으로, 버려진 정원으로 들어서듯 책의 페이지 속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책의 주위를 배회한 지는 벌써 여러 해가 된다... 그녀는 아직 쓰여지지 않은 페이지들을 들춰보았고 심지어 어떤 날은 낱말들을 기다리고 있는 백지상태의 페이지들을 소리나지 않게 스르륵 넘겨보기까지 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무에서 유가 창조되듯이, 존재하지 않던 책은 드디어 그녀가 책 속으로 들어옴으로써 시작된다. 그러니까 그녀는 작가인 동시에 화자이고, 유일한(듯한) 주인공이며 그 자체로 소재이자 주제이고, 그 자체로 하나의 메시지 혹은 메신저라고 할 수 있다, 고 여겨본다.
“걸음걸이가 보기 흉하고 어깨가 엄청나게 떡 벌어진 그 여자는 살과 피가 아니라 눈물로, 오직 눈물만으로 된 존재였다. 그녀는 한 여자에게서가 아니라 모든 남자 모든 여자의 고통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가장 헐벗은, 구걸하는 존재였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고유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자신의 몸도, 심지어 자신의 눈물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보임의 세계의 극한적 변경에서, 그리고 대개는 보이지 않음 속에서 끝없이 걷고 또 걸어야 했다.”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나타날 뿐인(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한 소설의 나머지 부부은 ‘그녀의 나타남의 연대기’이다) 그녀는, 프라하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부모로 삼고 있으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희노애락을 젖줄로 삼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녀는 우리가 볼 수 있는 세계의 가장 변경에 위치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볼 수 없는 세계의 중심에 서 있다.
“프라하 거리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의 그 크고 비물질적인 몸 속에서 나직하게 소리내며 흐르는 것은 비탄에 잠긴 사람들의 눈물인 것이다... 그 울고 다니는 여자는 두 가지 세계 사이에서,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 현재의 세계와 과거의 세계, 살과 숨의 세계와 먼지와 침묵의 세계 사이에서 끝없이 다리를 쩔뚝거리고 있다. 그 여자는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 사이를 오간다. 사라진 자들과 살아 있는 자들의 것이 한데 섞인 눈물의 남모르는 밀사가 되어.”
게다가 그녀는 우리들이 알고 있는 모든 세계에 존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세계들을 연결시키는 교량의 역할을 한다. 그녀가 흘리는(이라기보다는 그녀 자체인) 눈물이야말로 이 모든 것들의 총합인 동시에 또다른 시작점이 되어, 전세계를 쩔뚝거리면서도 끊임없이 이동한다. 그녀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부분만이 소설에 드러나 있지만, 실제로 그녀가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을 때조차 그녀는 그렇게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 여자는 시간의 살갗이다. 지나가고 미끄러지고 사라지는 시간, 그늘 속에서, 대낮의 광명 속에서 끊임없이 지워지며 캄캄한 어둠 속으로 깊이 빠졌다가 대낮의 빛 속에서 불쑥 솟아나는 시간. 그 여자는 시간의 살갗을 훑고 지나가며 그 살갗을 부르르 떨게 하는 신비스러운 전율이다. 피로, 흥분, 다정함 혹은 고통의 전율일 뿐 결코 분노의 전율은 아니다.”
이 부분에서 작가에게 살짝 반한다, 시간의 살갗, 이라니... (물론 번역자인 김화영의 공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우리들이 알고 있는 장소와 시간들만이 아니라 시간의 살갗, 이라고 명명되어도 좋을 신비로운 ‘시간의 장소’에까지 자신의 촉수를 들이민다. (시간의 살갗이라는 표현에서 굉장히 에로틱한 느낌을 받았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나오면 한번 사봐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순전히 시간의 살갗, 이라는 이 두 단어 때문이다.)
“... 그녀는 어디든 간다. 그 어디에도 몸담아 살지 않고 모든 장소에 깃든다. 그런데 텍스트 역시 장소다. 심지어 텍스트야말로 대표적인 장소다. 텍스트는 무슨 일이든 다 일어날 수 있는 장소다... 텍스트는 고독, 부재가 환하게 밝혀지는 장소, 공허가 날카로게 우는 소리를 내고 침묵이 노래하는 장소다... 절름발이 거인여자는 고동치는 짧은 한순간만이라도 심장을 침몰시켜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는 그 텍스트들을 관통하며 지나간다. 그녀의 발소리는 텍스트들의 단어 속에 반향되고 그녀의 눈물은 행간에서 번뜩인다.”
책의 후반부로 가면 그녀의 실체가 조금 분명해지는 것 같다. 책 속으로 걸어 들어온 그녀는 이제 오롯하게 텍스트가 된다. 그녀는 단어이기도 하고, 문장이기도 하고, 힘들여 그 행간이기도 하며, 단어와 문장을 잉태하고 낳은 창작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창조자인 그녀만이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장소인 텍스트에 온전히 깃들 수 있고, 텍스트의 모든 것을 자신의 내부로 깃들이도록 만들 수 있다.
“거인여자는 그 두 가지 공간, 그 두 가지 시간성 사이를 걷는다. 그래서 그 여자는 쩔뚝거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는 범죄, 고통, 악, 불행의 짓누르는 듯한 무게와 신에게서 나오는 헤아릴 수 없는 연민 사이의 균형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그만큼 더 쩔뚝거리는 것이다.”
그래서 거인여자(그녀)는 두 가지 공간과 두 가지 시간, 신과 인간의 공간과 시간 사이를 절뚝거리며 걸을 수밖에 없다. 창조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때, 창조는 원래 신의 몫인 것. 그래서 책에 들어온 그녀에 의해 만들어지는 또 다른 세계, 텍스트의 세계는 신의 영역을 침탈한 인간(거인여자라는 지칭은 얼핏 신의 세계 이전의 티탄 족을 떠올리게 한다)을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 인간의 무게와 신의 연민을 동시에 가지는 여자는 둘 사이를 절뚝거리며 걷는다.
“그 여자는 책에서 밖으로 나갔다. 이제 그녀를 위한 페이지는 없다. 잉크는 지워져 투명해진다. 그러나 그 여자, 프라하의 거리에서, 이 세상의 모든 길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가 여기 있다.”
그리고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난다. 그녀가 책에서 빠져나감으로써 이제 이야기의 창조자도 없다. 실재하는 유일한 작업의 증거인 잉크는 지워져 투명해지고, 작가의 손을 떠난 그녀 혹은 텍스트만이 남는다. 그렇지만 창조자가 빠져나간 자리에서 이야기는 보다 분명해진다. 인간이면서 신의 영역에 도전했던 창작자가 사라진 텍스트, 그 텍스트는 혹은 그녀는 그제야 제대로 된 생명력을 부여받고, 세상의 길 위에서 울고 있는 우리들이 된다.
아, 힘겨운 독서였다, 이 좋은 봄날, 프라하 거리의 우는 여자라니. 창조자란 아무리 생각해도 밝고 명랑하기보다는 우울하고 음침한 존재에 가까울 터이다...
실비 제르맹 / 김화영 역 /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La Pleurante des rues de Prague) / 문학동네 / 2006 (1992)
ps. 아무리 생각해도 이 소설을 소설이라 규정하기 어렵다. 번역자인 김화영의 말을 옮기자면 이렇다.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는 소설도 아니고 시도 아니다. 책의 편집자가 그녀의 다른 저작들인 『광대함』과 『소금의 광채』와 더불어 이 작품을 ‘이야기’라고 소개하는 것은 바로 소설도 아니고 시도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구태여 장르의 구분이 필요하다면 이야기를 가진 긴 산문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