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마음의 그림자가 빚어내는 참화 속에서도 로맨스가...
작가의 가장 최근작이라고 할 수 있는 <천사의 게임>을 읽은 이후 그의 소설을 찾아서 읽을 작정을 하였다. 찾아보니 그렇게 많은 작품이 번역되어 있지는 않다. 그를 우리나라에 소개한 <바람의 그림자>가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 시기적으로 앞서 씌여진 <9월의 빛>을 먼저 읽기로 한다. 시나리오 작가에서 소설가로 전업하고 두 번째 쯤의 작품이려나...
읽는 동안 <천사의 게임>과 많은 부분 닮은 구석이 있음을 확인한다. 저택 혹은 성으로 대변되는 어두운 공간에 대한 묘사들이 그렇고, 현실을 배경으로 삼으면서도 환상적인 미스터리한 설정이 그렇다. 물론 주인공들의 죽음을 불사하는 로맨스 또한 그의 초기작에서부터 비롯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눈으로 보고 있는 듯한 배경 묘사는 시나리오 작가 출신이라는 그의 배경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만 위로 태양이 지기 시작했고, 등대의 렌즈는 바다 위로 붉고 노란 빛을 내보내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에 하늘은 아주 맑은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구름 몇 점만이 하얀 솜으로 만들어진 비행선마냥 하늘을 정처없이 떠다녔다. 이레네는 아무 말 없이 이스마엘의 어깨에 가볍게 기대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편지가 도입부에 등장하기는 하지만 소설의 시작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버지를 잃고 여의치 않은 생활에 한 줄기 빛이 되어준 라자루스 얀의 저택 근처 바닷가로 이사를 이레네는 이스마엘이라는 멋진 청년까지 만나게 된다. 저택에서 일을 시작한 시몬도 자신의 일에 만족을 하고, 이레네의 동생 도리안도 활기 가득한 모습으로 곶 위의 집과 마을을 오간다.
하지만 이처럼 평화로운 가족의 한때는 시몬과 함께 라자루스 얀의 저택에서 일하는 한나, 이스마엘의 사촌인 한나의 이상한 죽음과 맞물리며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제 음습한 저택의 거대한 천사상은 그저 덩치가 큰 장난감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조정받는 어두운 그림자의 화신이 된다. 그리고 이제 서서히 저택의 주인인 라자루스 얀의 과거가 밝혀진다.
“우리 어머니는 우리가 함께 장난감을 파괴해야만 한다고 고집을 피웠어요. 그것들이 재로 되었다는 것을 내게 확신시켜주기 위해서였지요. 어머니는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사악한 영혼의 그림자가 다시 날 찾아와 장난감을 만들 생각을 심어줄 것이라고 설명했어요. 내 행동의 모든 오점과 모든 잘못 그리고 모든 불복종이 그 그림자에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 그림자는 항상 나와 함께 다니고, 내가 그녀와 세상 사랆들엑 범한 나쁜 짓과 버릇없는 짓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어린 시절 어머니의 학대를 받았던 라자루스 얀은 장난감 제조자인 유령 같은 인물 다니엘 호프만의 도움을 받는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는 이러한 도움이 나중에 어떠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에 대해 무지한 탓인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저당잡히는 대신 자신을 괴롭히던 그림자를 구속시키는 힘을 얻은 것이다.
“... 그는 내게 미래를 선물했어요. 그 대가로 나는 한 가지만 하면 되었지요. 아무 의미도 없는 조그만 약속이었어요. 내 마음을 그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단지 그에게, 그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주면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이러한 약속으로 인해 라자루스 얀은 사랑스러운 부인 알렉산드라 얀을 잃었지만 이십여년이 흐르고 다시금 새로운 사랑에 눈을 뜨고, 그림자와의 거대한 싸움을 다시 한번 치르게 된다. 그러한 거대한 싸움의 끝에 살아남은 이들 특히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확인하였던 열다섯 열여섯의 이레네와 이스마엘은 세계대전이라는 시간을 보낸 후 청년과 처녀가 된 이후 자신들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주고 받게 된다.
“나는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을 보았어……. 이스마엘, 세상에는 그림자들이 있어. 너와 내가 그날 밤 크래븐무어에서 싸웠던 그 그림자보다도 훨씬 더 사악한 그림자들이 말이야. 그런 그림자들 옆에 있으면, 다니엘 호프만의 그림자는 그저 아이들 장난에 불과해. 그건 바로 우리 각자의 마음에서 나오는 그림자야.”
트라우마를 지닌 장난감 제작자의 어두운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그림자와의 싸움, 하지만 그 이후 이레네가 겪어야 했던 세계대전의 참화는 이러한 싸움을 장난처럼 느끼게 만들어버렸다는 실토가 소설의 말미에 느닷없이 등장한다. 좀 우스꽝스럽기는 하지만 우리들 마음 속 어두운 부분에 대한 어두운 우화로도 볼 수 있는 소설과 우리들 마음 속 어두운 부분의 총화라고 할 수 있는 전쟁을 은근슬쩍 빗대고 있음을 뭐라고 할 수는 없다. 최근작에 비해 조금 어설프다는 느낌이 강하지만 여하튼 이 작품으로부터 십여년이 흐른 뒤의 작가는 매우 훌륭하니까...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 송병선 역 / 9월의 빛 : 검은 그림자의 전설 (Las Luces de Septiembre) / 살림 / 283쪽 / 2010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