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헛한 밤이 드리우는 그림자를 닮아 있는 사랑의 이야기들...
언제나 나는 오래전처럼 사랑하였다. 윤대녕 또한 소설 속에서 여전히 오래전처럼 사랑하고 있다. 삶이란 헛헛한 밤이 드리우는 그림자와도 같으니 창 너머로 들이치는 달빛 같은 사랑 없다면 너무나 고요할 터이다. 윤대녕이 알고 있는 것을 나도 알고 있지만 함부로 발설하지 않는다. 발설은 오염을 낳고 그렇게 오염된 세상은 또다른 누설을 통하여 진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보리」.
청명에 만난 보리 같은 여자 수경, 그러한 수경과 그는 해마다 청명이면 어느 온천에서 연례 행사처러 만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이미 햇수로 칠 년이다. ‘껍질 벗은 검은 거북이를 천마(天馬)인들 어찌 쫓겠는가!’ 고만고만하게 어설픈, 흔하디 흔한 사적 애정 행각에 보푸라기 같은 가벼운 문체를 덧씌운 보리떡 같은 소설이지만 이 한 문장이 뇌리에 남는다. 껍질을 벗어버린 거북이는 그 무엇도 따라 잡을 수가 없으니... 그런데 소설 속의 그 여자는 정말 껍질을 벗은 것일까.
「풀밭 위의 점심」.
‘부모를 여읜 어린 남매들처럼’ 붙어다니던 대학 시절의 세 사람... 반구대 근처 천전리 각석 뒤편의 너른 풀밭 위에서 세 사람이 함께 한 점심, 그리고 한 장의 기념 사진... 친구나 연인처럼 지낼 수도 있을 것 같았던 이 관계는 깨어지고 이제 나이를 먹은 이들이 다시금 서로의 삶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다.
「대설주의보」.
윤수와 해란... 1996년에 만났으나 해란 친구의 저속한 방해로 두 사람은 헤어졌다. 그리고 2003년 두 사람은 백담사에서의 일박으로 해후를 한다. 2005년 서울 광화문에서 만나 다시금 헤여진다. 2007년 묵호에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나 여관에서 회를 먹는다. 그리고 이제 다시 백담사에서 두 사람은 만나려고 하지만 눈이 길을 가로막고 있다. 이 사랑의 연대기는 대설주의보 속에서 어떻게 또 한 페이지를 이어갈 것인가.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
처음 내게 최무룡의 노래 <꿈은 사라지고>를 불러주었던 사고뭉치였던 삼촌... 그가 부르던 노래가 좋아 한사코 그 노래를 읊조리던 나... 문정숙의 <나는 가야지>라는 노래를 잘 부르는 연상의 여인과의 연애... “좋을 때는 물론 좋지. 하지만 늘 그런 건 아니야. 하나만 덧붙이자면 여자 나이는 남자 나이와 달라. 물론 몸도 다르고. 나이를 먹을수록 여자가 앞서 간다 그런 얘기야.” 하지만 한때는 연인이었던 여자는 숙모가 되고, 그 숙모는 캐나다로 떠나고 삼촌은 남는다. 그리고 중환자실에 있는 삼촌을 두고 나와 숙모는 그때 그 시절을 생각한다.
「오대산 하늘 구경」.
여동생의 결혼식에 참석차 아내는 떠나고, 연미는 비슷한 시각 한국으로 들어오며 내게 전화를 한다. 그리고 연미는 나의 오대산행에 동행을 하게 되고, 주문진을 거쳐 오대산 월정사 근처의 호텔에 묵게 된다. 그리고 ‘참으로 하늘이 공활한’ 바로 그 날에 연미는 노비구니를 따라 암자에 들어가고, 나는 그녀가 돌아오기를 산문에서 기다린다. 그리고 그녀가 산문에 모습을 나타내는 순간 모든 것은 바뀐다.
「도비도에서 생긴 일」.
“이건 순전히 내 느낌이지만, 시는 여자와 같은 것이더군... 한 번 배신당하면 두 번 다시 울어주지 않더군. 시는 또 물질적으로 눈물과 성분이 같거든. 그것이 굳어 고요한 새벽에 푸른 돌로 변하게 되지.” 영화사와 출판사와 시인과 카피 작가와 기획실장과 시나리오 작가와 소설가와 미쓰 강과 기타 등등과... 번드르르한 명칭들이 돌고 도는 동안 썩은 내는 진동하고 혜경씨이자 시나리오 작가이자 소설가이기도 하였던 미쓰 강은 도비도에서 죽었다.
「여행, 여름」.
토지 문학관에서 처음 만났던 Y와 나의 오래전 술 여행... 부산을 거쳐 고래 고기가 있다는 강구항으로의 여행...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화장품 가게 여자... “우리는 누구나 삶의 일부만을 살다 가는 존재가 아닐까요? 그것도 아주 일부만을.” 이라고 중얼거리던 Y에 대한 그리움까지...
서슬 퍼렇던 윤대녕의 문장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그 자리엔 서슬 퍼렇던 한 시절의 윤대녕이 가지고 있던 흔적만이 초췌하게 남아 있다. 소설 속 남자와 여자들의 사랑이 어딘가 초췌해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에 연민을 느끼듯이 난 그 흔적에 연민을 느낀다. 그 흔적에는 나의 젊은 시절 또한 조용히 스며들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윤대녕 / 대설주의보 / 문학동네 / 302쪽 /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