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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Oct 28. 2024

천명관 《고령화 가족》

언제나 그 자리, 엄마 품에서 충전되는 고령 자식들의 에너지...

  작가의 첫 장편에 감복하였지만 그의 다음 소설집에서는 그 감흥이 조금 다운되었다. 하지만 이제 다시 찾아온 그의 장편 소설에서는 다시 한 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놀이공원 흥행의 역사를 간직한 롤러코스터라도 탄 듯, 옹기종기 사적인 역사를 지닌 호흡곤란 유쾌통쾌 가족 캐릭터와 함께 하는 독서는 흥미진진하다. (아무래도 영화에 대한 오랜 애정이야말로 작가의 캐릭터 창조 정신의 기반이 되었을 터...)


  “... 집을 떠난 지 이십여년 만에 우리 삼남매는 모두 후줄근한 중년이 되어 다시 엄마 곁으로 모여들었다... 이혼과 파산, 전과와 무능의 불명예만을 안고 돌아온 우리 삼남매를 엄마는 아무런 조건 없이 순순히 받아주었다. 그리고 그 옛날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 다시 끼니를 챙겨주기 시작했다.”


  한 편의 입봉작을 마지막으로 이제는 모든 인간 관계마저도 끊기고 만 실패한 영화감독 출신의 둘째 아들인 마흔 여덟의 나(이또한 어쩌면 영화판을 기웃거린 자신을 투영시킨 것 아닐까), 백 킬로그램이 넘는 몸무게에 폭력과 강간과 사기와 절도라는 다양한 범죄 전력을 가진 쉰두 살의 첫째 아들, 그리고 이제 두 번의 이혼 끝에 과년한 딸자식까지 데리고 칠순의 엄마에게 의탁을 하러 들어온 사십대의 막내딸 지연으로 이어지는 이 고령화 가족의 (손녀인 민경의 나이를 합한다고 하여도 가족의 평균 나이가 사십이 넘을 터이니) 어느 한 시기이지만 그렇게 비참해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고? 어쨌든 가족이 함께 있으니까, 그리고 이들의 중심에는 엄마가 있으니까...


  “... 젊은 시절 외간남자와 눈이 맞아 자식들을 팽개친 채 야반도주를 하기도 하고, 어두운 진실을 사십 년간 감쪽같이 덮어둔 채 배다른 자식과 씨 다른 자식을 억척스럽게 한집에서 밥해먹여 키우고, 세상사에 실패하고 돌아온 자식들은 다시 거둬주고, 뒤늦게 재회한 옛사랑을 불륜의 씨앗인 딸의 결혼식장에 불러들인 엄마라는 여자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우리의 모든 엄마들이 그러하듯 머리로 생각하는대신 몸으로 먼저 그들을 거두는 것에 익숙한 엄마에게 모여든 이들 늙다리 세 자식은 한없이 못났다. 하지만 아직 그들이 집을 떠나기 전의 엄마 품과 다르지 않은, 언제든 자신의 곁을 내어주는 엄마의 품 안에서 이들은 또다시 (씨가 어떻든 배가 어떻든) 가족이라는 숙명의 내부에서 스스로 다시금 흥행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목표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다 과정이고 임시라고 여겼고 나의 진짜 삶은 언제나 미래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결과 나에게 남은 것은 부서진 희망의 흔적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헤밍웨이처럼 자살을 택하진 않을 것이다.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지질하면 지질한 대로 내게 허용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게 남겨진 상처를 지우려고 애쓰거나 과거를 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곧 나의 삶이고 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할 때, 다시금 스스로를 부추기는 힘을 끌어내는 데에 가족만한 것이 없다는 한국적인 정서에 기대고 있는 소설이다. 거기에 첫소설 <고래>로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하고 영화 연출쪽으로 다시 나아간다고 하였던 작가의, 소설이나 써야겠다, 이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 라는 언명이 뒤섞여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라고 쓰고서 작가의 프로필을 검색해보니 영화 <이웃집 남자>의 시나리오를 썼단다, 그렇군... 3,500원 내고 다운받아 봐야겠다...) 


  성공한 자들만을 혹은 일등만을 기억하는 이 더러운 세상에 혹처럼 달라 붙어 있는, 실패하였으되 그럭저럭 다시금 살아갈 요량으로 힘을 내보는 중년의 인물 군상들에게 적잖이 애정이 간다. 어쩌면 마흔의 나이에 시작된 이 작가의 늦어도 한참 늦은 소설가 행보에 애정이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때때로 삶이 가지는 진지함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고 여겨질 때, 어깨의 힘 빼는 데에 특효약으로 작용하는 소설이다.

 

 

고령화 가족 / 천명관 / 문학동네 / 291쪽 /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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