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에부는바람 Oct 29. 2024

배지영 《오란씨》

솔직하고 걸쭉하게 우리들 실상의 어두운 일각을 일갈하라...

  우리들 현실의 어두운 일각으로부터 시선을 피하지 않고 솔직담백한 언어로 일갈하는 작가이다. 심심하고 말랑말랑한 어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작가의 입담은 여성 작가라는 명명 안에서 위축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세상을 향하여 들이받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해 보이는, 이 ‘오란씨’처럼 톡톡 튀는 맛을 지닌 작가가 보여주고 있는 허여멀건 한 우리들 세상의 추악한 진실을 기대하시라...


  「오란씨」.

  올림픽이 한창인 1988년, 일명 쌍팔년도 즈음의 모래내 시장 풍경... 벤 존슨과 칼 루이스의 백미터 대결이 흥미로웠고, 지강헌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주창하였던 그때 그 시절의 모래내에서도 살아 남았던 지입 덤프 트럭을 몰고 다니는 그가 이제 일생 일대의 추격전 속으로 또는 그때 그 시절의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여자는 자고로 오란씨 같은 거야. 이렇게 먹고 버리는 거야. 그치만 딱 한 사람한테는 별도 따 주고 모든 걸 다 주는 거야. 그게 남자야.’ 배다른 형과 술집 오란씨의 설희와의 사랑은 그렇게 시대를 뛰어 넘어 이제 나와 국박집 순희와의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일는지... 여성 작가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걸쭉하고도 흥미로운 입담 속에는 그만큼 걸쭉한 사랑이 있고 그만큼 걸쭉한 우리들의 얼마 되지 않은 과거사가 들어 있다.  


  「버스 - 슬로셔터 No.1」.

  “... 살인범에 대한 유언비어만 돌아도 매출이 올라갈 정도니, 이런 거국적인 연쇄살인에는 특별한 홍보 없이도 판매량이 늘었다. 하지만 이런 대형 사건 사고가 없을 때 사회면의 여성 수난 기사는 썩 괜찮은 홍보물이 되었다...” 각종 호신용 물품을 판매하는 회사에 다니는 내가 어느 날 버스에 올랐다가 흉흉한 상상에 빠져든다. 출근 길 강물은 불어나고 다리는 끊긴 것 같은데, 엉뚱한 길로 달리기를 계속하는 버스와 능글맞은 버스 기사... 그리고 나는 버스 좌석 한 켠에 엉뚱한 문구와 핸드폰 번호를 남겨 놓게 되는데...


  「몽타주 - 슬로셔터 No.2」.

  어느 날 자신의 옆집에서 시체가 발견된다. 게다가 그 남자는 연쇄 살인범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의 시체는 집에서 처리가 되었단다. 그리고 이제 그 옆집 사는 사람으로 인터뷰까지 한 나에게 심지어 그 연쇄 살인범에게 공범이 있었다는 소문까지 들린다. “... 기억이란 골몰할수록 탈색되고 윤색되지만 그럴수록 정교하고 확실하다는 느낌은 강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인터뷰 이후 나는 누군가에게 쫓긴 것도 같다. 설마 그 사람이 공범일까...


  「파파라치 - 슬로셔터 No.3」.

  거금을 주며 파파라치 수업을 받고 한 여자와 짝을 이뤄 신고 보상금을 타기 위한 작업을 하고 그 사이에 슬쩍 그 여자와 섹스를 하고 그 섹스 비디오를 찍어 또다른 판로를 개척할 생각을 하고 그 사이에 누군가와 시비가 붙고 그 시비 붙은 남자가 다구리를 당하는 장면을 다만 옆에서 촬영할 뿐이고... “... 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 밤하늘엔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구름이 없다 해도 매연이 가득한 서울 하늘에 별이 보일 리 없었다. 다만 그의 머리 위에 노상 방뇨를 감시하는 CCTV 불빛만이 반짝거릴 뿐이었다.” 카메라로 찍고 CCTV로 찍히는 우리들 일상의 자화상을 조금 극단적으로 몰고 간다면 이런 장면이 나올 수도...


  「어느 살인자의 편지」.

  최초로 고양이를 죽인 후부터 손에서 사라지지 않던 고양이 냄새 혹은 살인을 부르는 냄새... “... 난데없이 이국적인 과일 향이 나는 빈민촌 소설이 아닌, 익숙해지지도 떼어낼 수도 없는, 그의 손바닥에서 나는 그런 ‘냄새’나는 글을 쓰도록 말이다.” 액자 소설을 취하고 있는 단편에는 자신의 살인의 행적을 자수하는 살인자의 편지가 들어 있고, 그러한 편지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형사 혹은 우리 사회가 있다. 그리고 결국 작가는 자신의 속내를 들이댄다. 우리들의 구석진 동네에 시선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꾸미되 전혀 그곳의 ‘냄새’를 풍기지 않는 작품들을 향하여 일갈하고 있는 셈이다. 그의 단편들을 읽어보면 이 작가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기도 하다.


  「검정 원피스를 입다」.

  아들을 보채는 집에서 결국 아들을 낳지 못한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의 마지막 딸 (이자 아들)이 되어버린 나... “... 난 태어나기도 전에 살인을 저질러 버린, 불행한 카인의 후예가 되었다. 살해의 대가로 받은 카인의 표란, 결국 여자이면서 남자처럼 남자이면서 여자처럼 살아야 하는 인생의 천형을 받게 된 것이다...” 쌍둥이로 잉태되었으나 홀로 살아남은 나는 어미의 손에 이끌려 아비의 불륜 현장을 찍어야 하는 불행 속에 산다. 그런 내게 유일한 위안은 학교 친구이자 사랑하는 신아뿐... 하지만 신아는 죽고 나는 스스로를 여성이게 하는 검정 원피스를 입고 신아 앞에 선다...


  「새의 노래」.

  웅폐기물 처리 공장의 부지로 선정된 섬에는 어느 날부터 거대한 새가 날아 들었다. 그 섬에는 백치 여인이 살았고 거지 노인이 살았다. 섬의 남자들은 백치 여인과 잠자리를 했고 새는 알을 낳았으며 알에서 태어난 듯한 소년은 거지 노인과 함께 술을 팔았다. “한 잔의 술을 마시면 슬픔이 몰려왔다. 두 잔을 마시면 깊은 상처가 떠올랐다. 세 잔을 마시면 난데없는 환희가 온몸 가득 먹먹하게 들어찼다. 네 잔을 마시면 웃음이 튀어나왔다. 다섯 잔을 마시면 우쭐해졌다. 여섯 잔을 마시면 마치 하늘을 비행하는 듯한 아찔하면서도 신비로운 감정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제 백치 여인은 아마도 큰 새를 낳은 것이다.

 

 

배지영 / 오란씨 / 민음사 / 341쪽 / 2010

매거진의 이전글 천명관 《고령화 가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