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제목을 읽고 나면 김훈이 혹시 다른 이들로부터 ‘너는 어느 쪽이냐고’ 질문이라도 받았었나 싶다. 그렇지만 같은 제목의 글을 산문집 내부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원래 2002년에 묶여 출간되던 당시의 산문집 제목은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였다고 하니 애초에 그런 생각으로 산문집을 엮은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산문집 추간 이후 작가의 이념적 혹은 당파적인 위치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을 향하여 김훈식의 독설을 퍼부은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나의 글을 읽고 ‘너는 어느 쪽이냐’ 라고 묻지 말아라, 라는 제스처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김훈의 이념적 지향점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는 것 같다. 굳이 김훈이 지향하는 바를 넘겨 짚어 보자면 모든 이념적인 사항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이념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작가의 과거의 행적 중에 몇몇 부분이 걸린다고들 하지만 (예를 들어 조선일보의 동인문학상을 주저없이 받는 것과 같은...), 민주투사라고 지칭되었던 사람들의 지금의 행적들에 비하면 뭐가 대수랴.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성추문으로 미국의 위신이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미국 행정부와 의회는 르윈스키의 속옷자락에 묻어있던 대통령의 정액 몇 방울을 기어코 찾아냈다... 그 과정은 치욕의 사실을 사실로서 정립함으로써 치욕을 씻어내는 장엄한 드라마였다... ‘사실’은 아무리 치욕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 이미 정의를 내포하고 있으며, 여론이 사실을 몰고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여론을 이끌고갈 때 민주주의는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클린턴의 정액은 입증해주었다.”
이와 함께 김훈이 직시하는 것은 날것 그대로의 사실이다. 김훈은 있는 사실을 없는 듯 투명하게 통과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 사실에 자신의 글을 더하여 사실과 다른 무언가로 희석시키는 일을 자행하지 못할 사람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의 남성적인 글쓰기는 그의 강단있는 문체에서도 비롯되지만, 치욕마저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는 어떤 정신에서도 비롯된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그의 산문이 온통 그렇게 부러질 듯 강직한 글들로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산문집이 출간될 당시의 원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때때로 자신의 가족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물론 그러한 순간에도 그는 비뚤어진 세태를 직시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대신 조금 부드럽게...
“자식을 기르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부양기간은 길어진다. 재수하고 군대 갔다 와서 취직 못하면 서른이 넘도록 먹여주어야 한다. 아무리 길러도 자라지가 않는 것 같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 ‘생계를 도모하기 위하여 여기저기에 썼던’ 글이라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글은 읽기에 부족함이 없다. 더불어 거기에 스며 있는 생각의 가지들은 여전히 생동감이 있다. 당장이라도 쭉 뻗어나가 한 편의 소설이 되고 말 것 같은 생각의 움들이 제가 틔울 자리는 더듬는 듯 비죽비죽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니 그의 오래된 산문집을 보는 것은 그의 나중의 소설이 태동되는 최초의 순간을 바라보는 일과도 같다.
“... 땅속에서 나온 옛 악기와 옛 자를 들여다볼 때 그때와 지금 사이에 끼여 있는 1천 4백여 년의 시간은 소멸하는 것 같다. 시간은 앞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다. 뒤로도 간다. 앞으로 가는 시간과 뒤로 가는 시간 사이에 우리는 끼여 있다. 그것이 삶의 순간들이다. 모순에 찬 삶은 그래서 여전히 신비하다.”
아마도 김훈이라는 작가는 이쪽과 저쪽에서 모두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힘찬 필치가 어느 쪽인가로 기울어지는 순간 어느 쪽은 환호작약하고 또 다른 어느 쪽은 발끈할 것이다. 작가의 충실한 독자로서 다만 그가 이문열이나 김지하와 같이 늙고 병든 걸음을 걷지 않기를 바란다. 그저 이 아프고 병든 세상 바라보기를, ‘아이놈들이 옆집 매화를 보면서 팝콘이 먹고 싶다고’ 그러듯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김훈 /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생각의 나무 / 287쪽 / 2009 (2002, 2004,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