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하지만 번복하지 않는 꾸준한 상수와 변수가 만드는 완벽한 날들...
얼마 전에 김연수의 단편 소설 〈수면 위로〉를 읽었다.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인생도 그런 게 아닐까? 나는 행복하고 슬프지 않다. 나는 행복하지 않고 슬프다. 나는 행복하고 슬프다. 나는 행복하지도, 슬프지도 않다. 이 모두를 말해야지 인생에 대해 제대로 말하는 게 아닐까?”
빔 밴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마지막 장면에는 야쿠쇼 코지의 형언하기 힘든 표정이 롱테이크로 등장하는데, 퍼뜩 위의 저 문장이 떠올랐다. 야쿠쇼 코지, 그러니까 도쿄의 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의 표정은 슬펐다가 행복했다가 둘 다였다가 어느 하나도 아니었다가를 오가는데, 그것은 히라야마의 표정이기도 하면서 곧 영화를 보는 내 표정이기도 하여서 그저 오묘하였다. (야쿠쇼 코지는 이 배역으로 작년 칸 영화제의 남우 주연상을 수상했다.)
극장 상영 중에 〈퍼펙트 데이즈〉를 보지 못하였는데 대신, 어떤 영화일까 때때로 상상했다. 영화 〈패터슨〉과 결이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줄거리는 여기저기서 어쩔 수 없이 듣고 읽은 내용이 모여져 짜깁기 되었다.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영화를 본 것과 진배 없다, 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조금 김이 빠질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뒤늦게 아내와 함께 영화를 보는 동안 그리고 영화를 본 다음까지 한동안 모호한 긴장감이 유지되었다.
히라야마는 도쿄의 화장실을 청소하는 일을 한다. 이른 아침 바깥의 비질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다. (출근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켜는데, 난 그 부분이 어색하고도 좋았다. 집과 일, 꿈과 현실의 경계선을 긋는 것만 같았다.) 출근길에는 테이프로 오래된 음악을 듣는다. 그리고 할당된 화장실에 도착하면 히라야마는 최선을 다하여 청소한다. 청소를 위하여 도구를 제작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점심은 항상 정해진 장소, 나무가 울창한 신사의 벤치에서 먹는데,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필름 카메라로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향해 찰칵, 렌즈를 들이민다. (이후 필름이 다 돌아가면 항상 정해진 사진관에 가져가 인화를 맡기고, 이전에 인화를 맡긴 사진을 찾아 집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같은 장면을 찍지만 히라야마는 그중 자신이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고르고 그것을 저장한다.
함께 영화를 보고 나서 아내는, 일본어에는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뜻하는 단어가 있다고 했다. 그래? 라고 반문하자 ‘고모레비 こもれび’ 라는 단어를 알려줬다. 그런데 최근 우리말에도 비슷한 단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볕뉘’라는 단어인데, ‘작은 틈을 통하여 잠시 비치는 햇볕’, ‘그늘진 곳에 미치는 조그마한 햇볕의 기운’라는 뜻이다. 정확히 일치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뉘앙스는 비슷한 단어이다. 아직 아내에게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사진 찍는 것과 함께 히라야마는 또 다른 취미는 이제 막 가지를 뻗기 시작하는 작은 나무를 모으는 취미도 있다. 사진을 찍는 신사의 나무 밑에서 어린 나무를 발견하면 캐서 집으로 옮긴다. 퇴근 후에는 자전거를 타고 목욕탕으로 향한다. 목욕을 끝내면 지하 상가에 있는 식당에서 반주와 함께 식사를 한다. 집에서는 자리에 누워 책을 보고 그러다 잔다. 그리고 여러 가지 꿈을 꾼다.
크게 어긋남이 없다면 한없이 평화로운 히라야마의 일상은 단조로와 보이지만 의외로 다채롭다. 그는 동료 청소부인 타카시와 그의 여자 친구인 아야와 잠시 엮이기도 하고, 매일 마주치는 홈리스나 점심 식사 때의 회사원도 있다. 화장실 틈에 껴 놓는 메모지로 이름 모를 누군가와 게임을 즐기기도 한다. 밤에 들르는 선술집의 여주인과는 썸을 타는 중일 수 있고, 헌책방 주인은 그가 들르면 툭 하고 한 마디씩 던지고는 한다.
예를 들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불안을 묘사하는 천재적인 작가죠. 그녀 덕에 공포와 불안이 다르다는 걸 알았어요."라고 거들거나, "같은 단어라도 이 작가가 사용하면 느낌이 완전 다르다"라며 <나무>의 고다 아야를 기리키는 식이다. 히라야마는 매일 저녁 자기 전에 책을 읽는데, 영화에는 윌리엄 포크너의 <야생 종려나무>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11>, 고다 아야의 <나무>가 등장한다.
이러한 다채로움만으로도 충분해 보이지만 어느 날 여러 해 보지 못하였던 조카 니코가 찾아오는 커다란 사건까지 발생한다. 히라야마는 결국 연락을 끊고 살았던 여동생에게 연락을 취해야 했고 니코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우리는 이를 통해, 이 한없이 평화로운 히라야마의 과거를 조금 엿볼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어슴프레한 중년의 사내를 정확히 알 수는 없고, 그저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 같은 힌트에 잠시 눈을 찡긋할 수 있을 뿐이다.
빛과 그림자, 일상과 꿈, 현재와 과거, 남은 것과 사라진 것, 오래된 것과 더욱 오래된 것의 총합인 한 사내에 대한 길지 않은 시간 동안의 기록물인 영화인데 감응이 깊었다. 영화에 삽입된 루 리드나 애니멀스의 음악 또한 카세트테이프 만큼이나 고색창연하였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Pale Bule Eyes가 나올 때는 영화 〈접속〉이 곧바로 떠올랐는데 영화 음악의 위력이 어떠한지를 반증한다.
영화 속 반복되는 이 중년 남자의 매일은 정말 충만할까. 짐작하기에 그는 서툴지 않고 모든 반복은 완벽하였다. 그리고 그 완벽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때때로 그를 침범하는 변수들 덕분이다. 책과 음악과 사진과 어린 식물과 작은 숫자의 이웃으로 구성된 영화 속 그의 매일은 침범으로 위태로울 수 있지만 오염되지 않는다. 그는 반복하지만 번복하지 않고 꾸준한데, 그 상수와 변수가 함께 ‘퍼펙트 데이즈’를 만들었다.
빔 밴더스 감독 / 야쿠쇼 코지 출연 / 퍼펙트 데이즈 (Perfect Days) / 124분 / 2024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