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추장스러운 도덕률을 뒤로 하고, 욕망의 마지막 퍼즐을 찾아서...
불온하지 않은 욕망이 있을까. 천형처럼 가지게 되는 욕망, 그리고 욕망의 근거지인 삶을 통하여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하루하루를 매치 포인트에 놓인 운동선수처럼 살고 있음에도, 매번 첫 번째 점수를 내는 순간의 짜릿함을 욕망하고 있는 우리들 모두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거추장스러운 삶의 도덕률, 그 도덕률과 그 도덕률을 무장해제 하려는 욕망의 사이에서 한 조각 부족한 퍼즐처럼 나약한 인간을 향하여 작가가 여는 작은 포문들...
「BED」.
“... 이런…… 일상. 이런…… 삶. 결국……. E는 지금 이 순간이, 마치 미래의 생의 어느 한 순간에 오롯이 박제되어 들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은 전생의 기억처럼 익숙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다. 그러나 지울 수 없는 얼룩처럼 희미하지만 확고했다. 소름이 끼쳤다.” E를 사랑하였지만 이룰 수 없었던 B, 그러한 B가 선택한 여자 D. D를 선택하였음에도 잊을 수 없었던 E. 그러한 E와 B의 관계를 알아차린 D. 그리고 어느 날 E와 사랑을 나누었던 침대 BED에서 죽음을 맞이한 B. 그리고 이제 E에게 B의 죽음이 기록된 침대 BED를 보내는 D...
「퍼즐」.
“... 단 한 조각의 마지막 퍼즐 조각을 완전하게 맞추기 위해 퍼즐 게임은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생은, 생의 에너지는, 결핍을 채우려는 불완전한 욕구로 허덕일 뿐ㅇ다. 그게 인생과 퍼즐의 차이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퍼즐을 하는 여자의 내면에 쌓이는 아귀 맞지 않은 욕망의 조각들을. 아직 제자리를 기다리고 있는 유예된 증오의 부스러기들을.” 전처의 나이든 딸, 그리고 딸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자궁으로부터 퇴출된 아이들의 기억을 고스란히 몸으로 간직하고 있는 아내, 그러한 그들의 집에 일을 도와주러 오는 파출부 안씨와 그의 모자란 아들, 그리고 을씨년스러운 집안과 그 집안의 오래된 우물 하나...
「바람의 말」.
“바람이 나를 샅샅이 뜯어 먹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렇게 내 몸의 장례를 치르며 나아간다... 바람은 내 갈비뼈를 통과하고 내 골반을 통과한다. 내 몸으로 꿈속 같던 먼 시간들이 쏴아아, 지나간다. 흩어지는 시간은 먼지바람이 되어 버린다. 나는 흩어지는 바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본다.” 엄마와 딸이 떠나는 안나푸르나 서쪽 코스로의 트래킹은 그리 산뜻하지만은 않다. 고등학생인 딸과 남편을 두고 자신의 사랑을 찾아 떠났던 엄마, 그리고 엄마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했던 딸은 그렇게 여행을 떠난다.
「네비야, 청산 가자」.
“... 내일이 출국 날이다. 그러나 돌아가고 싶지 않다. 미수는, 문득, 실종되고 싶다... 아아, 나는 길을 잃은 걸까.” 자동차 사고 때문에 어느 순간 성장이 멈춰버린 동생 만수, 그리고 그러한 만수의 신부감을 찾아 중국으로 넘어간 만수의 언니 미수와 만수의 엄마... 번들거리는 욕망을 적나라하게 시장에 내놓아 거래를 하는 그곳에서 미수는 자신이 8년이나 기다렸던 한 남자와 식물인간이었다가 깨어나게 되었다는 그의 아내를 생각한다.
「여주인공 오영실」.
“... 내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나는 내 몸에 잠시 강한 전류가 통하는 느낌을 생생하게 느꼈다. 운전자는 여자였다. 아주 짧은 순간, 그녀를 잠깐 일별한 찰나, 나는 깨달았다. 그녀는 틀림없이 ‘나’였다. 거부할 수 없는 나였다...” 조금 안이한 액자소설의 형식이기는 하지만... 소설을 쓰는 내게 소설 속 주인공을 자처하며 등장한 오영실이라는 여자, 그리고 그 여자의 실체를 확인하러 가는 길에 목격하게 되는 자동차 사고, 그리고 확인할 길이 없어져버린 나의 과거...
「꽃 진 자리」.
“꽃이 왜 피어야 하는지, 꽃 스스로 그 이유를 모르듯이 10년 전 그해 봄, 남자는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남자는 한 여자를 죽였다. 그리고 흔적 없이 여자를 묻었다. 바로 여기, 선배가 심은 복숭아나무 밑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땅에 묻은 수선화 뿌리처럼 새봄이면 남자의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부활했다. 대신 10년 동안 남자는 자신의 삶을 죽여 나갔다.” 복숭아 나무로 대변되는 욕망들, 그 욕망은 시간의 흐름도 거역하는 것이어서, 10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활활 타오름으로 부활하는 듯하다.
「딥 블루 블랙」.
“꿈을 꾸었다... 나는 바다에서 물 위를 경쾌하게 발레를 하듯 걸었다. 마치 푸른 색 거울 위를 걷는 것 같았다... 푸른 거울이 흐물거리며 녹더니 자잘한 파도가 일었다... 그런데 바닷물을 보니 투명한 물이 아니라 짙은 청색 페인트였다. 딥 블루 블랙... 두려움 때문에 온몸에 푸른 페인트를 묻힌 채 바다에서 힘차게 솟구쳐 나왔다. 그런 내가 이상했다. 그때 내 몸이 인간이 아니라 새라는 걸 깨달았다... 팔을 펼쳤더니 날개가 됐다. 그리고 몸이 가볍게 떠올랐다. 내 날개는 바다처럼 푸른색이었다. 하늘을 날고 있는 나의 궤적을 뒤돌아보았다. 배의 선미가 만들어 내는 항적(航跡)처럼 연푸른 길이 내 뒤를 따라왔다.” 대양의 어선에 올라 체험을 하는 작가 프로그램에 참가했다가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한 작가... 한없이 깊은 바다의 알 수 없는 심연은 마치 우리들 마음 속의 심연과도 같으니, 그곳을 향하여 뛰어든 그녀는 우리들의 마음 속 진실에 가라앉듯 도달할 수 있었을까.
권지예 / 퍼즐 / 민음사 / 274쪽 /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