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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Nov 04. 2024

듀나 《용의 이》

두루두루 양적으로 현학적인 듀나의 한국식 SF 변종 환타지 장르물 선물

  ‘세계 몰락 프로젝트 혹은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앨리스’라고 스스로 명명하고 있다. 자신감 가득한 씨네마키드였고, 전방위적인 텍스트 라이터였던 ‘듀나’ (혹은 ‘듀나라고 불리운 이들’) 이라면 충분히 사용할법한 명명이라고 할만하다. 질적인 현학이 아니라 그야말로 양적인 현학으로 무장한 ‘듀나’의 속이 깊지는 않으나, 두루두루 널찍한 한국식 SF 환타지 변종 장르물의 집합이다. 


  「너네 아빠 어딨니?」.

  엽기, 근친상간, 코믹, 호러, 좀비물인 소설은 현재 영화화도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잘하면 한국식의 걸출한 B급 무비가 탄생할 수도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달동네에서 살고 있는 초등생 자매에게 벌어진 이 이야기는 그야말로 슬프고 역겨우며 잔인하고 씁쓸하기 그지없다. “지금까지 나는 무대가 되는 달동네를 새별이네 가족만 사는 텅빈 공간처럼 그렸어. 정말 그 동네가 그런 곳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다룰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지. 이야기라는 게 원래 그래. 흐름에서 벗어나 있는 정보를 억지로 중간에 끼워 넣을 이유는 없는 거야.” 군데군데 과도한 작가의 개입이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애초에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썼다고 하니 넘어가기로 한다. 물신숭배에 빠져 허우적대는 대한민국의 맹렬한 도시민들을 은근히 (아니 노골적으로) 빗대고 있는 소설이 영화화 되었을 때의 모양이 궁금하다.


  「천국의 왕」.

  이건 뭐 퇴마사의 이야기도 아니고... 베르나르 베르베르처럼 정교하지는 않지만 어설픈 죽음과 그 죽음을 이렇게 저렇게 퍼즐처럼 맞춰간다. 물론 그렇게 죽은 이들이 죽었으되 살아남는 과정이 중요한 것은 아니고, 그렇게 죽음마저도 권력화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중요한 것이겠지... “... 나는 불멸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지상의 감정을 끌고 다니며 영생을 누리길 원치 않는다. 육체의 죽음 이후 남기는 것이 지금의 내가 아니라 나의 그림자라고 해도 사정은 바뀌지 않는다.”


  「거울 너머로 건너가다」.

  문득 제5원소의 그 오페라 가수가 떠오르는구나... 먼 외계 행성 정벌 과정에서 우연하게 발견된 지적 식물체가 지구의 각종 예술 장르에 푹 빠지게 되고, 또 그것이 키취적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바로 그 외계 행성에 낙오되어 있던 모녀가 전우주적 스타가 된다는 설정은 그야말로 유니버셜하다. “정글의 취향은 약간 아줌마 같았다. 정글은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의 소프 오페라, 홍콩과 대만의 이십 세기 멜로드라마, 십구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와 같은 것들에 푹 빠졌다. 그중 가장 좋아했던 건 부당한 사회의 억압 속에서 고통 받는 아름다운 여자 주인공들이었다.”


  「용의 이」.

  중편소설로 표제작이다. 죽어 있는 존재와 살아 있는 존재가 뒤섞여 있다는 설정은 앞선 <천국의 왕>과 비슷하고, 외계 행성에 있는 일종의 생물체들이 행성에 잔뜩 엮여어떤 연결된 신경 체계로 존재한다는 설정은 앞선 <거울 너머로 건너가다>와 비슷하다. “보통 유령들에게는 자아가 없어. 나는 아직도 어리둥절해하는 시체에게 설명했다. 그들은 과거에 있었던 일들의 기억에 불과해. 다른 행성이라면 이들은 허공에 잠시 머물다 사라지겠지만, 이 행성은 사정이 조금 달라. 이곳 생물들은 지능에 비해 신경계가 지나치게 발달해 있고 정신들은 모두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어. 그 결과 유령들이 살아남아 활동할 수 있는 신경망이 존재하는 거지. 저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가끔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것도 그 안에 통합되었기 때문이야...” 꽤 정밀하게 외계 행성과 그 행성에 조난당한 소녀, 그리고 죽은 채로 살아 있는 다양한 존재와 이 존재들의 중심에 있는 여왕에 대한 묘사가 되어 있기는 한데...

 

 

용의 이 / 듀나 / 북스피어 / 415쪽 /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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