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냥 옹호할 수 없는 현대판 피리 부는 사나이의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우리들도 잘 알고 있는 동화인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를 모티브로 하여 우리들 일상에 드리워져 있는 거대한 음모(?), 그리고 이 음모를 사이에 두고 펼쳐지는 젊고 지고지순한 사랑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소설은 특히 안정적인 문체가 인상적이다. 그러나 소설의 시작이 굉장히 유연하고 매끄러운 반면 중반 이후로 넘어가면서는 의욕이 과하였다고 해야 할까.
“...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 모든 이야기는 피리 부는 사나이에게로 다가가는 여정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이야기로 만들어진 미로이기도 했다... 과연 미로의 출구를 찾아다니는 일이 그 정도로 가치 있는 일이었을까? 나는 알지 못한다. 언젠가 미로를 빠져나가면 진정한 세계를 만나게 될까? 어쩌면 그곳은 또다른 미로일 뿐이지 않을까? 나는 여전히 그 답을 알지 못한다.”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나는 도서관에서 이런저런 책들을 읽으면서, 그리고 그곳에서 안면을 익힌 수현(다른 대학을 다니다 온 탓에 나이는 두 살 많은)과 소통하면서 조금씩 세상을 익히는 중이다. 그러나 수현의 사라진 기억의 이야기, 그리고 그곳에서 맞닥뜨린 피리 소리와 사라지기 직전에 눈을 마주친 어떤 사내에 대하여 듣게 되면서 묘한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그러는 사이 같은 과 동기인 정현과 지내게 된 하룻밤이 왜곡되면서 난감한 지경에 빠지고, 수연에 대한 자신의 감정의 정체에 대하여 종잡을 수 없어 하는 사이 갑작스러운 수연의 사라짐으로 더욱 오리무중의 지경에 빠지게 된다. 같은 집에서 다른 방을 사용하는 유일한 친구 우진, 그리고 우진을 통해 소개받은 이반 형 정도가 그의 유일한 말벗이 되어주던 시절을 지내던 나는 외국으로 떠난 수연을 위하여 이제 피리 부는 사나이를 찾을 결심을 한다.
“... 시간이 쌓여가며 깨닫게 된 것은 중요한 이야기일수록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어다. 그 당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들은 지금은 대부분 잊혀져버렸다... 오히려 가장 일상적인 이야기, 반복되는 말버릇, 사소한 몸짓이나 표정 같은 것들이 시간의 파괴력을 이기고 살아남아 수연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녀의 웃는 방식, 이따금 내게 눈을 맞출 때의 표정, 그녀의 말이 갖는 독특한 리듬, 그런 것들...”
하지만 바로 이 시점부터 이야기는 조금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일상에 기대고 있는 사사로운 환상과 그 환상을 통하여 새롭게 거듭나는 일상 쯤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소설은 그야말로 갑자기 글로벌한 사회 문제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댄다. 영국의 나, 독일의 수연, 미국의 우진을 넘나들고 인도에서 발생한 산업 재해와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려고 시도하는 테러리스트 집단과 그 집단의 미스터리한 지도자라는 어지러운 확장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니 일상의 이야기가 조근조근 진행되던 소설의 초반부에서 왜 ‘나는 그 이야기가 얼마 뒤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라거나 ‘그때는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라면서 끊임없이 내가 읊조렸는지를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갑작스러운 소설의 진행에 놀라지 말라는 소설가의 친절한 복선이었다고 해야 할까.
“결국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땅에 돌아온 내게 남은 것은 오직 질문들뿐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들에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피리 부는 사나이 외에는 없었다. 나는 그를 만나 물어야만 했다. 그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의 피리 소리가 무엇을 위해 울리는 것인지...”
하지만 소설은 갑작스러운 우진의 죽음과 여전한 수현의 실종 상태, 그리고 마찬가지로 여전한 피리 부는 사나이의 미스터리 등이 고스란히 남겨진 상태에서 끝이 나고 만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는 좋은 의도로 마을에 해를 입히는 쥐를 처리했다가 결국에는 마을의 아이들까지 어딘가로 데리고 사라졌다지만, 소설 속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 나타난 피리 부는 사나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불명확할 따름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피리 부는 사나이가 쥐를 없애는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될 것인지, 아니면 아이를 사라지게 만드는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될 것인지를 우리는 결국 알지 못하는 셈이다.
피리 부는 사나이 / 김기홍 / 문학동네 / 343쪽 /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