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굵은 서정 속에서도 냉정한 시선을 잃지 않는 김훈식 소설의 풍요...
“한낮의 해가 기울고 염전 바닥에 앙금이 엉기기 시작하면 마을의 염부 鹽夫들은 ‘소금이 온다’고 말했다. 소금은 고요히 왔다. 소금은 노을 지는 시간의 앙금으로 염전에 내려앉았다. 소금 오는 바닥에는 폭양에 조여지는 시간의 무늬가 얼룩져 있었고 짠물 위를 스치고 간 바람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공기가 말라서 바람이 가벼운 날에 바다의 새들은 높이 날았고 새들의 울음은 멀리 닿았다. 그런 날 햇볕은 염전 바닥에 깊이 스몄는데, 늙은 염부들은 ‘소금 오는 소리가 바스락거린다’고 말했다.”
역시 김훈은 김훈인가보다. 얼마전 디지털 글쓰기의 일환으로 블로그에 연재되는 소설 혹은 그러한 소설 쓰기에 대하여 함량 미달의 작품을 생산하는 원흉인 것처럼 주절거렸는데, 김훈은 마찬가지의 최신식 글쓰기 방식에도 불구하고 전혀 흔들림 없는 글발을 보여줌으로써, 몇몇 작품들로 같은 방식의 작품 활동을 하는 모두를 한통속으로 밀어붙이는 침소봉대의 오류를 저질렀음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아, 김훈의 간결한 문장들에 비하면 나의 문장은 얼마나 구질구질한가, 더욱 비교된다...)
“... 일연은 오히려, 애초에 황룡사를 지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었던 유토피아의 원형에 관하여 썼습니다. 이것이 당대의 야만에 맞서는 그의 싸움이었습니다. 저는 『삼국유사』에 수록된 많은 노래와 이야기 들은 그가 한 생애에 걸친 유랑의 길 위에서 채집한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노래와 이야기 들은 모두 잿더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원형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의 생애는 야만과 살육의 시대에 쓸리며 소진되었지만, 원리와 현상이 다르지 않다고 믿었던 점에서, 그는 행복한 인간이었습니다.”
이번 소설에서 김훈은 다양한 인간군상들, 그리고 그들의 곁을 맴돌고 있는 묵지근한 사건이나 상황을 관찰하고 적는다. 마치 저 옛날 일연이 삼국유사 속에서 민초를 다루는 방식으로, 그는 어떤 벌어진 사건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그 사건의 당사자인 인간에게 시선을 맞춘다. 그렇게 김훈은 자신의 방식으로 이 세상의 ‘원리와 현상’을 읽고 싶어하는 것만 같다.
‘인간은 비루하고, 인간은 치사하고, 인간은 던적스럽다. 이것이 인간의 당면문제다. 시급한 현안문제다.’
그러기 위해서 김훈은 인간을 마냥 따뜻하게 바라보는 방식을 택하는 대신, 좀더 냉혹한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보고 있다. 밀고자가 되어 고향을 등지기도 하고, 사건의 현장에서 습득한 귀금속으로 팔자를 고쳐보려 하기도 하고, 죽은 아들의 장례에 참석할 염도 내지 못하고, 죽은 딸의 보상금을 몰래 수령해가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에 대하여 작가는 소설 속 기자에 살짝 편승하여 냉정한 시선을 들이댄다.
“... 인연은 풀려서 흩어졌다. 그것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었다. 부재하는 것들의 한시적 응집일 뿐이었다. 자궁은 증발하고 혈연은 해체되었다.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증발과 해체는 숨막혔고 스산했다. 오금자는 그 스산함에 실려서 한동안 두 발로 땅을 디딜 수 없는 모양새로 떠다녔다...”
그렇다고 해서 김훈의, 김훈식의 서정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뚜벅뚜벅 읽다보면 어느새 입술을 앙다물게 되는 작가의 선 굵은 서정은 여전하다. 세상을 향하여 똑바로 손가락질 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아마 항시 세상에 대한 목마름으로 가득하리라 여기는 이 기자 출신의 작가는 이렇게 또 한 편의 작품으로 (절대 졸작을 허락하지 않는) 자신의 작품 리스트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
김훈 / 공무도하 / 문학동네 / 328쪽 /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