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물간 소재와 최첨단 소설쓰기가 만나 시시껄렁한 괴물을 만들 때...
잘 모르겠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하지만 절대로 ‘갈팡질팡’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던 전작들에 비하여 이번 작품은 소설 속에서 매일매일 약을 먹어야 하는 (행려병자나 정신병증의 환자들을 수용하는) 시설의 사람들처럼 우물우물, 무슨 말인가를 하고는 있는데 그것을 해독하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기필코 이 힘겨운 해독의 길을 내가 뚫고 나가고야 말겠다는 투지나 집념을 발현시키는 글이라고도 보기 어렵다.
소설은 시설에서 같은 방을 쓰고 있는 나(진만)와 시봉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여동생이 있는 시봉이나 아버지가 있는 나는 그렇게 자신이 이곳에 있게 된 연유에 대해서조차 희미해진 기억을 간직한 채, 하지만 매일매일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 죄에 대한 댓가로 주먹질을 당하고, 그 주먹질 후헤야 죄 사함을 받은 듯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는 현실에 충실할 따름이다.
“어쨌든 우리는 사과만 대신해주면 되는 거니까, 뭐.”
그러던 어느 날 우연찮게도 외부로 유출된 쪽지에 의해 시설은 망가지고, 두 사람은 시설을 나오게 된다. 뭔가 새롭게 출발을 해볼까 하지만 모든 것이 흐지부지, 결국 두 사람은 시봉의 누이 시연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 둥지를 튼다. 이미 그곳을 선점하고 있는 경마 중독자인 기둥 서방과 함께 살게 된 두 사람은 비록 시설을 나오기는 했지만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사과’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동네 슈퍼 근처에 자리잡고 있는 정육점과 과일 가게 사내를 대상으로 한 집요한 사과, 그것을 출발점으로하여 오래전 자신이 버린 아내와 아들에게 사과를 하는 일다운 일을 하게 된 그들의 이 사과 대행 아르바이트는 그러나 그렇게 순탄치만은 않다. 사람의 목숨보다도 사과를 우선으로 삼은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천연덕스럽지만 어딘지 너무 끈적거린다.
“... 바로 그 중년 남자였다. 중년 남자는 우리가 죄를 물었을 때, 딱 한 번, 자기 죄는 자기가 알아서 사과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했었다...”
감옥에 갇힌 시설의 원장, 그리고 출소 후 다시 나 진만과 시봉을 찾아온 복지사 커플이 등장하고, 내가 찾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정체도 드러나고, 시연을 은근히 좋아하는 나의 업고 뛰기가 숨가쁘게 전게되지만 그다지 소설 속으로 빨려들기가 쉽지 않다. 주인공인 두 사람의 흡입의 힘은 약하고 이들을 보좌하는 주변인들의 어줍잖은 발설들은 엉거주춤 난무한다.
재기발랄하면서도 메시지 전달에 충실하였던 소설가이자 적절한 산문을 통해서도 우리를 웃기고 울릴 줄 아는 작가가 왜 이런 패착을 뒀을까, 하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인터넷 연재라는 터널을 통과하여 나온 소설들이 겪는 혼란스러운 먼지 뒤집어 쓰고 있는 모양새를 다시 한 번 확인한 것 같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말인즉슨, 한물간 소재와 최첨단 소설쓰기가 만났을 때 이런 시시껄렁한 괴물이 등장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기호 / 사과는 잘해요 / 현대문학 / 240쪽 /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