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하는 삶 속에서도 행복 찾기에 매진하는 이 시대 청년의...
편지를 써본 지 정말 오래되었다. 가난했던 청년 시절의 나는 때때로 현재의 나의 아내의 생일 선물을 구매할 돈이 없어 A4 용지를 빽빽하게 채운 편지와 귤 몇 개로 입을 싹 씻은 적도 있지만 이제는 드문드문 카드의 삽지에 몇 자 끄적이는 것도 힘이 딸린다. 그 비슷한 시절의 나는 독일에 유학을 간 친구에게 영화 <타락천사>를 보며 바둑 복기라도 하듯 자막과 지문을 직접 써서 보내주는 정성을 보였지만, 이제는 한국으로 돌아온 그 친구가 전시회를 연다며 문자를 보냈는데도 바빠서 가지를 못한다.
그렇게 과거 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린 편지를 전면에 등장시킨 소설이 올해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그렇다고 과거의 향수가 물씬 묻어나는 고답적인 소설인 것은 아니다. 편지를 쓰고 답장을 기다리기는 하되, 소설 속 주인공은 나는 맹인 안내견 출신이지만 현재는 자신의 눈이 멀어버린 개 와조와 함께 현대식 모텔을 전전하는, 모던하고 독특하며 때로는 추레하고 측은한 여행을 다니는 중이다.
“내가 편지를 쓰는 이유는 그들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도 하루가 존재했다는 걸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내게 편지는 일기 같은 것이다. 다만 그 하루가 내게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부쳐진다는 것뿐이다…”
여행을 떠나게 된 계기는 자신의 집에만 있으면 시작되는 발작 때문이다. 어차피 집이 있어도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친구네 집을 전전해야만 했던 나는 그럴 바에는 아예 집 바깥에서 생활을 할 작정으로 떠났다. 게다가 선천적으로 말을 더듬던 나는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나는 이렇게 만난 사람들 중 주소를 밝힌 사람들에게 넘버를 부여하고 그들에게 편지를 쓴다. 그리고 그들의 답장이 자신의 집으로 배달되기를 기다린다) 그 말더듬증이라는 문제도 해결했다.
“그러니까 이 여행은 내가 죽지 않고 살아가는 한 방법이고, 말을 통해 점점 강해지기 위한 강구책 중의 하나이며, 세상과 부딪쳐보기 위한 하나의 실험이다…”
주인공이 보내는 편지를 통해 드러나는 가족 구성원의 면면도 주인공의 여행 목적만큼이나 만만치 않은 구석이 있다. 무형의 것들을 모으는 취미를 가진 선생님 출신의 어머니, 발명가이며 가족의 불행이 있을 때마다 지하실에 처박혀 무언가를 하나씩 발명하는 아버지, 나와는 달리 천재적인 머리를 지녔으되 나에게 자유롭게 살라던 형, 모든 것은 외모에서 나온다면서 이른 나이에 성형 수술을 감행하는 여동생 지윤, 그리고 어머니의 주선으로 우편배달부를 하던 나까지…
그리고 이제 나는 길 위에서 만난 751번째 사람이자 나와 마찬가지로 길 위에서 자신의 소설을 파는 751번과 함께 여행을 하기에 이른다. 티격태격 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서로를 돕기도 하고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한 정을 751번과 나눈 것을 끝으로 나의 여행은 막을 내린다. 그리고 나는 이제 자신이 떠났던 그 집으로 돌아오고, 그곳에는 나와 나의 가족에게 있었던 비극 그리고 내가 받지 못했다고 여겼던 답신의 결과물들이 그를 기다린다.
꽤 참신한 시도이고 그 시도에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고독하여 애잔한 심경이 어느 정도 실려 있다. 그렇지만 소설 속 주인공의 심경을 이해할 수는 있으되 그 심경에 흠뻑 동화되기에는 미흡한 감이 있다. 부유하는 나를 대신하여 길 위에서 만난 인물들이라도 어딘가에 뿌리내린 듯 굳건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그들마저도 부유한다. 마지막 순간의 반전으로 이 모든 부유하는 심정을 가라앉히기에는 아무래도 부족하다.
장은진 /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 문학동네 / 294쪽 /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