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창경원에서의 기억 한 토막 소환하며...
포천 송우리의 초등학교에 다닐 때 나의 첫 서울 나들이가 이루어졌는데, 지금의 창경궁 그때의 창경원이었다. 어린이날이었고 발 디딜 틈이 없는 그곳에 들어가 먼지가 풀풀 날리는 흙바닥 어딘가에 부모님 그리고 세 남매가 들러 앉아 준비해 간 김밥을 먹었다. 사방에서 부모의 손을 놓친 어린 아이들의 울음 소리가 끊이질 않았는데, 시쳇말로 그때의 난리를 보자면 육이오 동란의 난리는 난리도 아니었다, 라고 표현할 법한 수준이었다.
“그런 사람을 무작정 만나러 가라니 나는 입맛을 잃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불친절하기밖에 더하겠어, 하는 옥도 생겨났다. 사는 게 친절을 전제로 한다고 생각하면 불친절이 불이익이 되지만 친절 없음이 기본값이라고 여기면 불친절은 그냥 이득도 손실도 아닌 ‘0’으로 수렴된다...” (p.70)
한 나라의 왕이 머무는 장소였던 궁을 동물과 식물로 가득한 정원으로 만들어버린 일본 제국주의의 폄훼 방식은 나의 어린시절까지도 유효했다. 다행히 창경원은 1984년 이후 창경궁으로 복원 작업을 거쳐 1986년 다시 일반에 공개되었다. 창경원 시절의 동물과 부속 건물들은 서울 대공원으로 옮겨졌고, 경내의 벚나무들은 여의도 운중로로 옮겨졌다. 그리고 소설에 등장하는 ‘대온실’은 창경원 시절로부터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건물이다.
“... 사람들에게는, 진심을 주지 않음으로써 누군가를 결국 무력화하는 힘이 있는데 어떤 부류들은 그런 진실에는 무관심하곤 했다.” (p.128)
소설의 제목도 그렇고 소재도 그렇고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데에 적합하다. 소설을 읽기 전이나 그 후에 이 ‘대온실’을 검색하지 않을 수 없는데, 당장 한 번 찾아가보고 싶은 전경을 확인할 수 있다. (팔십년대의 어린 내가 찾아갔던 창경원에서 보았음직도 하지만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말했잖은가 당시 어린이날 창경원에서의 난리가 어떤 수준이었는지를...) 가을 혹은 겨울이라면 더욱 보기에 좋을 것 같다.
“... 우리가 조사한 대온실 기둥만 해도 50여본이었다. 대온실의 중요한 건축적 특징은 목재와 철재를 혼합해 사용했다는 데 있었다. 철재로는 온실의 주요 기둥을 세웠고 내부의 클리어스토리와 캣워크 등을 만들었다. 클리어스토리는 온실 솟을지붕을 지탱하는 유리로 된 옆벽을 가리켰다. 캣워크는 온실 공중에 만든 폭 좁은 접근로로, 꼭대기 온실 창이나 키 높은 대형 수목을 관리하기 위한 장치였다. 대온실 외부도 목재와 철재를 같이 써서 입면을 구축했는데, 이 점이 당시 유렵 온실과 다른 특징이라고 한 직원이 말했다. 나무를 쓰면 결로로 썩게 되니까 당연히 철재로 짓는 것이 정석이었다. 지금도 대온실의 창틀들은 심각하게 노후된 상태였다.” (p.128)
다만 이 유효한 소재를 어떻게든 잘 만들어보고 싶다는 작가의 (스스로를 향한) 구애가 너무 강하지 않았나 싶다. 창경궁 내 대온실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그 주변에 있는 낙원하숙이라는 공간도 소설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다. 소설 속의 시간적 배경 또한 주인공인 영두의 과거와 현재에 머물지 않고, 낙원하숙의 할머니의 과거와 더욱 먼 과거까지를 섭렵하고 있다.
“그날 이후의 기억은 어떤 것은 상세하고 어떤 것은 듬성듬성 잘려 있다. 심리상담사는 방어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트라우마가 사라진 건 아니라서 말로 꺼내 질서화하지 않는 한 반복적으로 문제가 되리라고 슬픔을 어떻게 질서화할까. 나이가 훨씬 들고 나서도 나는 그 부분에서는 자신이 없었다. 슬픔은 안개 같은 것이라서 서 있으면 스스로의 숨결조차 불확실해지는데.” (p.201)
물론 여전히 김금희는 좋아하는 작가군에 속해 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 인물의 분야로 만들기 위한 학습의 흔적이 역력하다. 여전히 과하지 않고 간소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간이 정곡을 찌르며 다가서는 문장 또한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여하튼 덕분에 어린 시절의 기억 한 토막을 소환할 수 있었다. 소설 속 영두가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쓰다가 그리 된 것처럼...
김금희 / 대온실 수리 보고서 / 창비 / 419쪽 / 2024